2. 교수와 대외 활동 |2009. 08.13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9> 계일승목사

김인수/미주장신대 총장6ㆍ25 전쟁 중에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장로회신학교가 그 이름을 바꾸었다)에서 가르치다가 신학교가 부산으로 옮기게 되자 계 박사는 그곳에 가서 교수를 계속하였다. 전쟁이 휴전으로 멎자 서울 남산으로 옮겨온 신학교에서 교수를 계속하면서 학교 행정도 맡아 보게 되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교장은 박형룡박사였고, 계 박사는 교무과장으로 교무 행정을 맡아서 일하였다. 어려…

1. 출생과 교육 |2009. 07.29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9> 계일승목사

김인수/미주장신대 총장계일승목사는 1906년 평양 계리(鷄里) 10번지에서 의사였던 부친 계원식과 모친 이자희권사 사이에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계 박사의 조부 계택선은 평양에서 양약국을 경영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수업하고 5회(1912년)로 졸업하였다. 그는 평남노회에서 안수받고, 대동 장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따라서 계 박…

4.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 |2009. 04.29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이상규 / 고신대 교수ㆍ역사신학 박윤선은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가 믿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으며, 겸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김명혁은 박윤선에 대해 말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

3. 개혁주의 신학 확립을 위한 삶 |2009. 04.17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이상규 / 고신대 교수ㆍ역사신학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는 성경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로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1979년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간했다. 그의 첫 주석은 1949년 3월에 출판된 '요한계시록' 주석이었고, 마지막 주석은 1979년에 출판된 '에스라,…

2. 그의 학문의 여정 |2009. 04.08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이상규교수(고신대, 역사신학)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한 박윤선의 첫 신학논문은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이었고 그의 두 번째 논문은 바르트의 계시관 비평이었는데, 이것은 반틸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의 글에 나타난 계시의존적 사색도 당시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반틸적 대응이었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1936)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원어학을 …

1. 개혁주의 신학자 박윤선 |2009. 04.02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이상규 / 고신대 교수ㆍ역사신학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신학적 조류가 있어왔다. 유동식은 그의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개신교 신학의 흐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 참여의 신학', 그리고 '종교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별하고,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에 초석을 놓은 이로 길선주(吉善宙)와 박형룡(朴亨龍)을, 진보적 사회 참여의 신학의 초석을 놓은 이로…

4. 죽산 박형룡이 논쟁한 중요 사건들 |2009. 03.25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어떤 박형룡 연구가는 그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더 변증적이 됨으로써, 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아쉬워한다. "죽산이 정체성 보존에 너무나 열정을 쏟은 나머지 1960년대 이후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자처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시대의 아들로서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다."김재준은 '신학지남'(193…

3. 박형룡 사상에 대한 연구들 |2009. 03.19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최윤배 / 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박형룡의 사상'이라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박형룡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한국장로교회 내에서조차도 연구가의 신앙과 신학 성향과 소속 교단에 따라 흑과 백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박형룡을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요, 한국교회 신앙의 수호자며, 자유주의신학에 맞서서 '정통주의신학'…

2. 신학교 분열의 중심에 서다 |2009. 03.13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1927년 미국에서 귀국한 박형룡은 그해 8월부터 12월까지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928년부터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그는 1929년 5월 5일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0년까지 산정현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1928년 3월에 평양신학교의 임시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930년에 전임교수가 되고, 1938년 6월까지 가르쳤다.…

1. 초기 신앙과 교육적 배경 |2009. 03.10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죽산 박형룡(朴亨龍)은 음력 1897년 3월 28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박기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8년 10월 25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경기도 파주 청암교회 장지에 안장되었다.그는 서당에 다니다가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소학교(小學校)에 입학하였다. 16세에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숭실전문에서 공부하다가 중국 난징(…

4.학술적 가치 지닌 '비교종교론' |2009. 02.26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이진구교수(호남신대 초빙교수, 종교학) 채필근은 90여 년의 생애 동안 수많은 설교와 강연을 하고 잡지나 신문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지만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은 거의 없다. 그가 남긴 몇 권의 저서 중에서 가장 학술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비교종교론'(1959)이다. 이 책은 최근까지도 여러 신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의 교재로 사용될만큼 널리 읽힌 책이다. 그러나 채필근은 이 책이 매우 불완전하고…

3. 기독 지성의 대표주자 |2009. 02.26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이진구 / 호신대 초빙교수ㆍ종교학 채필근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서구와 일본을 통해 새로운 지적 사조가 밀려들어 오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사회주의, 유물론, 무신론 등으로 대표되는 세속 이데올로기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내세우면서 종교적 세계관을 위협하였는데, 특히 반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띤 사회주의자들이 기독…

2. 파란만장 인생 속 '明'과 '暗' |2009. 02.16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일본 유학 시절의 채필근은 명치학원과 동경제국대학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적 탐험을 즐겼으며 지식의 지평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특히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동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동서양의 역사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하여 세계사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까지 얻었다고 한다.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자 …

1. 공자 제자에서 예수 제자로 |2009. 02.04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이진구교수/호남신대, 종교학 채필근은 한국교회의 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목회자, 교육자, 지도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인물로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조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에 태어나 10월유신 직후인 1973년에 생애를 마치기까지 90여 년의 긴 생애 동안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인물이기도 하다.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태어난 채필근은 어린 …

3. 넓고도 깊은 그의 학문적 이력 |2009. 01.14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한국신학의 개척자들 <5> 이성휘교수

하경택교수/서울장신대 구약학 이성휘교수는 1928년 1월 '신학지남'에 '신명기 강해' 연재를 시작으로 1940년 9월 '출애굽기 강해'를 연재할 때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신학지남'은 1918년 3월에 창간된 평양신학교 기관지로서 1927년까지는 계간으로, 그 뒤로는 격월간으로 나오다가 1940년 9월호(제22권 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이성휘교수도 '신학지남'의 집필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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