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죽산 박형룡이 논쟁한 중요 사건들

4. 죽산 박형룡이 논쟁한 중요 사건들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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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25일(수) 17:09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어떤 박형룡 연구가는 그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더 변증적이 됨으로써, 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아쉬워한다. "죽산이 정체성 보존에 너무나 열정을 쏟은 나머지 1960년대 이후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자처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시대의 아들로서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다."

김재준은 '신학지남'(1934)의 권두언의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라는 논문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동정녀'에서 '여자'로 고쳐버렸다. 이 문제로 박형룡은 김재준이 참여한 '신학지남'의 편집위원을 내려놓게 된다. 창세기 저작문제로 박형룡은 연구위원회에 속했는데, 연구위원회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권을 부인하는 목사는 "우리 교회의 교역자 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는 결정을 하였고, 박형룡은 송창근과 김재준이 편집에 참가한 '아빙돈 성경주석'을 금지시키고, 공개사과토록 했다. 박형룡은 방대한 저서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서명'(1935)에서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등의 현대신학자들과 과정신학 등의 현대신학들을 "비정통주의 사상"이라 하여 총체적으로 비판하였다.

박형룡의 소위 '비정통적인 사상'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1950년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참여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 문제는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주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로 작용하였다. 그는 한 걸은 더 나아가 '복음주의연합'(NAE)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 신학적 모임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서 오켄가(Ockenga), 풀러신학교를 창시한 풀러와 칼 헨리 등이 있다. 박형룡은 심지어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지고, 한경직과 친분관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운동까지도 비판하였다. 박형룡에 의하면, 이 운동은 "첫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역사적 분계선을 파괴하려는 고의적 조직적 시도"로서 "헤겔의 정ㆍ반ㆍ합의 원리를 따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종합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박형룡은 WCC를 포용주의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를 배타주의로 규정하여 비판하고, 급기야 NAE와 RES(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 등 복음주의적인 초교파 단체와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박형룡은 1971년에 총신대학의 교수였던 김의환의 '지성인을 위한 로마서'를 이 같은 복음주의 신학계열에 있다고 하여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진리를 파상(破傷)한 번역"이라고 그를 비난했다.

우리는 박형룡이 논쟁한 중요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성서 고등비평학을 중심으로 박형룡이 1930년대에 김재준이나 송창근에 대한 비판은 신학이 발전되지 않았던 선교 초기 상황이나 오늘날의 성서학의 입장에서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 이후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거부한 것은 그 이후의 신학발전을 정지시켜 소위 '전통주의'에 머무를 수가 있다. 박형룡이 후기에 NAE의 복음주의신학운동이나 빌리 그래함의 전도와 선교운동 자체를 거부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평신도에 의해서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는'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같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적 유산도 물려받았지만,'12신조'처럼 역동적인 부흥과 선교 운동의 유산도 물려받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개혁ㆍ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우리의 최고의 교사이신 성령의 조명하에 "개혁된 교회는 항상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하여 성서적인 신학연구와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신학적 자유주의(自由主義)의 위험뿐만 아니라, 신학적 전통주의(傳統主義)의 위험도 알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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