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란만장 인생 속 '明'과 '暗'

2. 파란만장 인생 속 '明'과 '暗'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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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16일(월) 12:05

일본 유학 시절의 채필근은 명치학원과 동경제국대학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적 탐험을 즐겼으며 지식의 지평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특히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동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동서양의 역사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하여 세계사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까지 얻었다고 한다.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자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제의까지 받았지만 그는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채필근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10여 년 동안 학교 강의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교회와 단체의 요청에 의하여 부흥회와 사경회, 수양회 등에 청빙되어 수없이 많은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채필근은 193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린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여러 이유로 내분에 휩싸여 있던 장대현교회가 분규의 해결을 위해 그를 청빙한 것이다. 채필근은 4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분규 과정에서 상처받은 교인들의 심령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양 측으로부터 오해를 받는 등 여러 모로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채필근은 아빙돈성서 주석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아빙돈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 주석서를 국내의 신학자들이 번역하였는데 장로교에서 그 내용을 문제삼은 사건이 아빙돈성서주석 사건이다. 이 책은 역사비평의 시각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 신학이 지배한 당시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단서라고 규정하고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였다. 이때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은 공개 사과 대신 교계에 소란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간단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채필근은 즉각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집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再版)에서는 자신의 글을 빼겠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였다. 채필근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되었던 평양신학교가 1940년 새로 개교하자 채필근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신학교는 황민화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친일의 정도가 심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평양신학교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채필근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교장인 자신을 친일파로 비난한 반면 총독부는 학교 행정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자신을 매우 괴롭혔다고 그는 회고하였다.

일제 말엽 채필근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초대 통리로 취임하여 징병제를 지지하고 애국기 헌납 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친일행위로 인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부역자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으며 최근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평양 창동교회에서 잠시 시무하다가 6ㆍ25전쟁시 월남하였다. 남한에서는 부산 서북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은퇴 후 서울로 올라가 피난민 위주의 교회인 산돌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그는 80세가 넘은 나이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열정을 보였지만 1973년 향년 89세로 생애를 마쳤다.

이진구교수(호남신학대 초빙교수,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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