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 제자에서 예수 제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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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6> 채필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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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04일(수) 16:49

이진구교수/호남신대, 종교학


채필근은 한국교회의 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목회자, 교육자, 지도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인물로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조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에 태어나 10월유신 직후인 1973년에 생애를 마치기까지 90여 년의 긴 생애 동안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인물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태어난 채필근은 어린 시절을 유교적 분위기 하에서 보냈다. 한학자였던 부친은 외동아들인 채필근에게 엄격한 한학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부친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채필근의 삶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외출에서 돌아온 채필근의 부친은 방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더니 집안에 모셔두었던 조상의 위패와 점술에 관한 서적을 모두 꺼낸 뒤 마당 한 복판에서 불태웠다.

그리고는 어린 아들을 부른 뒤 조용히 "필근아! 우리도 교회 나가 예수 믿자!"라고 말했다. 이때 채필근은 큰 충격을 받고 아버지가 이단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부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유교의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일단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나면 자신의 뜻대로 해도 된다"는 공자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일단 부친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에 철저했던 소년 채필근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 길선주가 인도하는 사경회에 참여했다가 채필근은 결정적 체험을 하였다. 성경 속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어떤 힘을 발견하고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얼마 후 세례를 받은 채필근은 16세에 불과하였지만 자신이 다니던 뱅모루교회의 예배 인도인으로 임명되어 목회 활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채필근은 이 시절의 목회를 '병아리 목회'였다고 회고한다. 7년간의 예비 목회자 역할을 하던 그는 23세의 나이에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실의 근대적 교육은 그에게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채필근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 등이 조직한 '결사대'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문사건'으로 알려진 시위운동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얼마 뒤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고 숭실학교 안에 청년학우회를 세우고 회장으로까지 지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활동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자 북간도로 유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북간도로 가는 도중 그는 함경도 회령에서 만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바커(A.H. Barker)의 권유로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10여 년 간 목회를 하면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에는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는 함경도만이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오가면서 교회를 돌보았다.

가장 바빴을 때에는 경흥과 경원 지역에 13처, 만주 지역에 20여처, 또 새로 생겨난 교회 여러 곳을 동시에 맡았다. 예배가 중복되어 가지 못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3일 예배의 경우에는 수요일에만 보지 않고 교회마다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로 정해놓고 인도하였다. 채필근은 이 시기 동안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돈을 걷고 흙을 바르고 도배를 하면서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으며 3천여 회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가 회고하듯이 이 시기는 그의 목회인생에서 황금시대였다. 그러다가 1920년 캐나다선교부의 주선으로 36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는 새로운 삶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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