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생과 교육

1. 출생과 교육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9> 계일승목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29일(수) 09:29
김인수/미주장신대 총장

계일승목사는 1906년 평양 계리(鷄里) 10번지에서 의사였던 부친 계원식과 모친 이자희권사 사이에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계 박사의 조부 계택선은 평양에서 양약국을 경영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수업하고 5회(1912년)로 졸업하였다. 그는 평남노회에서 안수받고, 대동 장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따라서 계 박사는 할아버지 때부터 믿음의 뿌리가 깊은 가정에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계 박사 부친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평양에서 개업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벌었으나,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일제 경찰의 취조와 압박을 받았다. 부친은 일제의 눈을 피해 1930년대에 월남하여 시골 벽지인 전북 황등에 가서 기성의원을 개업하고 황등교회를 개척하여 섬겼다.

평양에서 숭덕소학교를 마친 계 박사는 부친을 따라 남하하여, 황등 근처 도시인 전북 전주에 있던 미션 스쿨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무고히 살해 당하는 와중에 귀국하였다. 계 박사는 일본에서 공부가 어려워 중국으로 건너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세운 로하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학교였다. 계 박사는 여기서 영어를 제대로 배워 후에 미국 유학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로하고등학교를 마친 계 박사는 북경에 역시 북장로교회가 세운 연경대학교(현 북경대학교) 공학과를 1930년 졸업하였다. 그가 연경대학에 다닐 때, 축구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여 스포츠에도 남다른 재질을 보여 주었다. 귀국하자, 할아버지가 졸업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동기생 중에는 새문안교회 담임 강신명목사, 한국교회사학의 태두인 김양선목사, 호남 교계의 거두 순천 매산학교 교장 김형모박사, 그리고 사랑의 성자 손양원목사 등이 있었다.

당시 신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장이 셋 있었는데,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는 신학 졸업장, 히브리어를 마친 이에게 주는 히브리어 졸업장, 그리고 헬라어를 이수한 이에게 주는 헬라어 졸업장이다. 계 박사는 일반 졸업장과 더불어 불과 몇 명 안 되는 졸업생들만이 받는 헬라어 졸업장도 받았다. 계 박사는 부친이 의사여서, 다른 학생들에 비해 재정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는 신학교 아래 있는 냉면집에 가서 좋아하는 냉면을 자주 사 먹었다. 졸업식 때, 이 냉면집에서 계 박사에게 특별 선물을 하였고, 그래서 친구들이 "냉면졸업장도 받았다"고 하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학교를 졸업한 계 박사는 1938년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이리 중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 후 부친이 개업하고 있던 황등에 가서 황등교회를 목회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계 박사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조지아주 디케이터에 있는 콜럼비아신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1948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버지니아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아, 195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 학교에서 역사신학 전공으로 '한국기독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ity in Korea)라는 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1930년대에 남궁혁박사가 이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그 학위는 명예신학박사(D.D.)였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그 해에 6ㆍ25가 터져 귀국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체미하게 되었다. 6ㆍ25의 와중에 계 박사의 아내 안인호사모는 황등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에 의해 황등교회 교우 10명과 함께 총살 당하여 순교하였다. 계 박사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는 후에 미 국무장관이 된 딘 러스크의 주선으로 미국을 떠나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하게 된다. 러스크는 남장로교회 교인으로 유니온신학교 교수들과 친교가 있었으므로 유니온신학교 교수들의 주선으로 러스크의 소개로 맥아더 사령부에서 한국 관계 컨설턴트 및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1953년 휴전으로 6ㆍ25 전쟁이 정전되자 대구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서 교수로 오라는 청빙이 와서 귀국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그가 생애를 바쳐 일할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교역자 양성의 일선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