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학교 분열의 중심에 서다

2. 신학교 분열의 중심에 서다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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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13일(금) 10:46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1927년 미국에서 귀국한 박형룡은 그해 8월부터 12월까지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928년부터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그는 1929년 5월 5일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0년까지 산정현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1928년 3월에 평양신학교의 임시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930년에 전임교수가 되고, 1938년 6월까지 가르쳤다.

1934년 9월 제23차 총회에서 '창세기' 저자 문제와 여권 문제를 위한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5년 1월에 '신학지남' 1월호의 권두언에 실린 김재준교수의 글을 문제 삼았고, 총 18장 8백4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근대 기독교신학 난제선평'에서 그가 말하는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다루고, 자신의 관점에서 비정통적인 신학과 현대사상을 비판하였다.

1938년 7월에 그는 신사참배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1942년 8월까지 동경에서 표준주석 집필에 전념하였고, 그 후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1947년 7월까지 만주신학원(동북신학교)에서 강사, 교수를 거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출옥한 성도들이 그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교회재건을 함께 논의하였다. 그해 11월 그는 평북 선천에서 신사참배 통회자복 금식기도 수양대회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는 이 수양대회를 마치자마자 북한의 교회 재건에 깊숙히 관여하지 않은 채, 봉천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가 북한 기독교계에 들어갈 자리도 참여할 의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 기독교계는 김재준과 송창근이 운영하던 조선신학교가 교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주남선, 한상동 등이 1946년부터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박형룡은 1947년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신학교를 떠나 1948년 6월 남산에서 세워지고, 제35회 총회가 직영신학교로 결의한 장로회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6ㆍ25 전쟁 이후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가 부산으로 피난갔고,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총회는 두 학교의 인가를 취소하고, 하나의 총회직영신학교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실패하여, 조선신학교 측은 기독장로회라는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1952년 감부열(A.A. Campbell) 선교사가 교장이 되어 장로회신학교 측이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육을 계속하였다. 박형룡은 1953년 총회신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휴전협정 후에는 서울 남산에서 교육을 계속 실시하였다. 1958년 박형룡은 3천만 환 사기사건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박형룡이 교장으로서 행정적인 실책으로 사임하게 되었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1959년에 총회신학교를 점령하고 모든 기물들을 강점하게 되자, 여기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광나루에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세웠다. 박형룡은 1960년에 총회신학교의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9년에는 제7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71년 9월에 총회신학대학 사태로 교장직에 물러났다가, 1972년 2월에 교수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1970년대에 박형룡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사상이나 1974년의 스위스의 로잔언약에도 신복음주의 사상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1973년 10월에 조직신학 시리즈 7권 완간에 대한 축하예배를 드렸다.

박형룡은 1975년 12월에 공로목사(서울노회 서현교회)로 추대되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원고를 밤 11시까지 정리하고, 취침한 뒤 1978년 10월 25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경기도 파주 청안교회 장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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