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의 길과 안중근의 길

이토의 길과 안중근의 길

[ 크리스찬,세계를보다 ] (7)

윤은주 박사
2024년 08월 23일(금) 22:31
아시아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근대화의 길로 진입했던 일본.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일본은 곧바로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국주의 팽창 열기에 몸을 실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전쟁을 거듭할수록 일본 군국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독일과 더불어 세계를 제패한다는 망상을 갖기까지 질주했는데, 미국이 투하한 두 발의 원폭으로 순식간에 꺾이고 말았다. 일본은 왜 미국을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벌였을까? 열강으로부터 자국을 지킨다는 자강론이 개혁의 시작이었지만 식민지를 갖고 나자 탐심이 분출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미국 본토를 공략했던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대외전략을 미국에 저당 잡힌 채 꾸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찍이 영국에 유학하며 당대 최고의 문물을 익혔다. 쇼군 천하의 막부 시절 사무라이 출신은 아니었지만, 조슈번 출신으로서 영국 유학 시절 쌓은 네트워크를 통해 공을 세운 이토는 28세 때 메이지 유신 정부의 효고현 지사로 임명됐다. 1868년 성공한 유신을 주도했던 이토는 1889년 발표한 일본제국주의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제1조부터 제17조까지 천황 관련 규정이 있을 정도로 국가 권력의 제도화에 있어서 천황을 구심점으로 내세웠다. 근대국가 정체성과는 모순됐지만, 천황제를 옹립하면서 근대식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메이지 유신 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양원제 의회제도와 의원내각제를 확립하고 초대 총리가 된 이토는 제국 군대를 구축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유럽 중립국을 따라 강소국의 빠른 성장을 주장한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국 대학 시스템을 구축한 모리 아리노리 등과 함께 일본식 제국주의 체제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모델 삼았는데, 이토는 독일 사회학자 로렌츠 폰 슈타인과 법학자 루돌프 그나이스트를 만나서 기독교 전통의 유럽과 다른 일본 특유의 근대국가 골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천황은 유럽식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하며 일본인의 정신을 묶어 세우는 구심으로 필요했는데, 신흥 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면서 전 일본을 통합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조선 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라고 규정한 독일 장교 야곱 메르켈의 지론은 '유수록'의 저자 요시다 쇼인의 조선 정벌론과 맞물려 '메이지 유신'파의 군국주의를 부추겼다. 메르켈 소령은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주장으로 공격적인 전술을 가르쳤다. 일본 본토가 주권선이면 조선 반도는 이익선이라고 규정, 열강으로부터 자국 보호를 위해서 조선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전개됐다. 이 단도가 약할 때 다른 패권국이 틀어쥐면 일본에 위협이 되므로 주변국들을 물리쳐야 한다고까지 확대되어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자국 보호를 앞세운 이 같은 침탈 논리는 유신파가 내세운 일본형 패권주의에 불과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활동에 나선 안중근 의사는 나라가 침몰 일보 직전까지 밀린 1909년 3월, 노보키예프스키에서 11명의 동지와 독립 투쟁을 다짐하며 왼쪽 약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 이 단지동맹 열사들에게 머지않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으로서 당당하게 이토를 처단했던 안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에 대한 정당성을 조목조목 밝혔다. 내용을 살펴보면 대한제국의 친위대 대장이 했어도 손색없었을 사안들로 가득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5개월의 옥중 생활 속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안 의사는, 천황을 내세운 선민의식에 바탕을 두고 민족주의 발흥을 지향했던 일본과 다르게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뤼순을 중립지대로 삼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청 3국이 협의체를 만들어 공동 은행과 연합군을 조직하며 대한제국과 청이 일본의 지도하에 경제개발에 나서자는 제안이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식민지 침탈이 아닌 선도국 지위를 통한 리더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론'은 선의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역사가 증명했다.

국제협력기구의 출범 전에 이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안 의사가 약육강식의 패권이 작동하는 국제사회를 몸소 경험하며, 국가 간 평화적 공존 방식을 절박하게 희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용서와 화해, 평화를 주요 덕목으로 삼는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었을 것이다. 근대문물을 빠르게 흡수하고 신속히 옷을 갈아입었어도 인류 보편의 가치를 함양하지 못하면 결코 서구 열강을 넘어서 발전하지 못함을 일본제국주의는 수많은 희생자를 배출하며 입증했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통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기독교 가르침을 성찰해보면 좋겠다.



윤은주 박사

(사)뉴코리아 대표·외교광장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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