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의 아름다움 |2012. 05.08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빈방 이야기

연극은 본질적으로 종합예술이다. 뛰어난 재주꾼 한 사람의 원맨쇼로 이뤄낼 수 없는 예술이다. 한 편의 연극이 막을 올리는 일은 극작가, 배우, 연출가, 무대감독, 셋트 디자이너, 조명과 음향 디자이너, 의상과 소품 디자이너, 분장, 작곡, 영상 전문가, 기획과 홍보 전문가 등 수많은 전문 인력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능력을 결집할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연출가가 있어서 모든 요소들…

터널 빠져 나오기 |2012. 04.27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 <16>

    ▲ 80년대 중반 선교공연을 위해 방문한 군부대에서. 서른 여덟 노총각에게 신혼의 행복은 각별했지만 그래도 연극 선교사역은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어쩌면,   마음의 안정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였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그 해 늦가을,'루터'의 재공연을 마친 후,계성여고 안에서 궁지에 몰려있던 필자에게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 준 사건으로 연결된다. 가…

'빈방'무대와 키큰 여인 |2012. 04.24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15)

건강이 안 좋으신 모친을 대신해서 치과대학에 다니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녀가 영락교회에서 동숭교회로 옮긴 직후 우리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 근처 마로니에 공원의 한 레스토랑에서 첫 데이트를 하던 날, 우리는 마치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얘기는 주로 내가 했고 그녀는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은 채 듣고만 있었다.…

'E sogno, o realta?' |2012. 04.13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

나의 30대가 그렇게 숨가쁘게 지나가다 보니 결혼과 같은 인생의 중대사도 생각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주변 친지들의 강요로 숱하게 많은 선을 본 것도, 몇몇 자매들로부터 진지한 구혼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나의 열정을 잠재울 만큼 내 마음을 빼앗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담임목사님께서 결혼이 더 늦어지면 집사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을까. 여기서 잠…

30대의 열정 |2012. 04.09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 방 이야기

당시 필자는 가톨릭 재단인 서울 계성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정규과목은 미술이었지만 특별활동 지도교사로 미술반과 연극반을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마다 미술작품 전시회와 연극반 공연은 물론이고 교사극회까지 만들어 제자들과 동료교사들을 관객으로 공연을 하는가 하면 개신교 학생들의 자발적인 기도모임의 지도교사로, 또 그들과 함께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극과 찬양으로 공연활동을 하는 등 눈코…

돕는천사들 |2012. 04.03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

평창동에 있던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의 전신)에서 극단 '증언'의 제2회 정기 공연작 '루터'의 연습이 시작됐다. (워낙 고도의 연기력을 요하는 작품이어서 기성배우들을 여러 사람 초빙했는데 주인공 루터 역은 당시 중견 연극배우로 신학을 하고 있던 전아 전도사가, 루터의 아내 카테리네 역은 탤런트 허진 씨가 맡게 되었다.) 연습은 시작되었지만 루터교 총회에서 지원받은 돈으로는 극장대관료 계약금…

성난 젊은이, 루터 |2012. 03.26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

창단공연을 어렵사리 마친 후 미처 쉴 새도 없이 단막 성극을 가지고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어느새 두 번째 정기공연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순회공연과는 달리 많은 예산과 높은 기획 역량을 요구하는 정규 극장 공연은 그만큼 부담스러운데도 말이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는 이미 '루터'라는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곡 '루터(Luther)'는 오래 전에 외국서적 전문서점에서 발견하고 흥분해서 …

젊은 시절의 열정, 혹은 만용 |2012. 03.12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10)

창단공연 이후 극단의 재정에 도움을 받는 방법으로 동숭교회 교우들을 중심으로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한편 단원 확충에 나섰다. 전문극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적 구성 면에서 동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설 필요가 있었다. 단원모집 공고를 보고 입단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계성여고 연극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소년팀도 만들어졌다.  그후 극단의 소속은 동숭교회로 하…

창단공연 유감 - 헤롯과 닭고기 |2012. 03.05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

1980년 4월,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막을 올린 극단 '증언'의 창단공연 '도마의 증언'은 비록 완성도는 높지 않았으나 신생극단의 의욕과 열정으로 나름 칭찬을 받은 절반의 성공작이었다. 제작비 마련이 어려워지자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고 있던 극단 총무가 자신의 등록금으로 우선 급한 지출을 할 정도록 여건은 열악했다. 무대장치라고는 극장의 텃마루를 쌓아서 기하학적인 구조물을 만든게 전부였…

[빈방] 극단 증언 - 연극으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2012. 02.28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이야기

동기부여가 분명해지자 극단 창단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 당시 전문성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기독교연극 활동을 살펴보면,마가렛 모어(한국명 : 모 진주) 선교사가 극단 가교에서 성극사역을 하고 있었고,경동교회에서 서울대 미학과의 김 문환 교수,극작가 이 강백 선생,서울예대의 연출가 양 정현 교수를 중심으로 전개했던 성극운동,그리고 '기독교시청각'이라는 단체를 통해 선교무대 '밀알'이 성극 보…

'해 돋는 골목길'과 가짜 막걸리 |2012. 02.21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 이야기

전문 기독교극단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가던 중,70년대 후반부터는 서서히 교회 안에서 작품들을 연출하여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규모를 제대로 갖춘 공연이 아니라 일종의 워밍업이나 실습 개념의 공연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을 도마의 시선으로 그린 이강백 극본 '도마여,그대는 보고 믿는가?',세태풍자와 기독교윤리를 성찰하는 김지하 원작 '금관의 예수',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신…

내 영혼을 어루만지신 하나님 |2012. 02.13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그 날 하숙집 마당에서 바라다 본 황혼녘의 교회첨탑과 십자가의 실루엣…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풍경일 수도 있었겠지만,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것은 놓칠 수 없는 하나의 의미,영적인 은유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위에 천천히 내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던 나지막한 언덕 위의 교회가 포개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귀소본능 비슷한 어떤 이끌림,그리움과 같은 느낌들이…

젊은 날의 초상 |2012. 02.06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이야기

필자가 걸어온 문화선교사역의 흐름을 독자들께 효과적으로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 '빈 방'이야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강원도 출신인 나는 유년시절을 강릉에서 보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성결교회에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신문사 편집국장이라는 감투 덕에 취재하러 여러 곳을 탐방하며 틈틈이 글을 썼다.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올…

'빈 방' 문화선교매체로 검증 받다. |2012. 01.30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4>

3일 간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이 극에 동화되면서 깊이 감동 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도하자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 문화선교의 현장에서 은혜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지진아에 대한 연민으로,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바보의 순수함에 감동해서,아니면 덕구의 투명한 영혼에 자신의 때 묻은 모습을 비추어 보며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웃음과 눈물로 가득했던 첫 무대 |2012. 01.13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이야기(3)

그 당시에는 공연을 알리는 홍보수단이래야 일간지에 보도의뢰를 하거나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보도의뢰를 했다고 해서 신문에 다 실어주는 것도 아니고,더구나 작은 신생극단을 위해 기꺼이 지면을 할애해 줄 너그러운 신문사도 없었기에 포스터 붙이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홍보 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일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포스터를 멋대로 붙였다가 적발되면 즉결심판에 회부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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