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빠져 나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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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 <16>

최종률장로
2012년 04월 27일(금) 16:02

   
▲ 80년대 중반 선교공연을 위해 방문한 군부대에서.

서른 여덟 노총각에게 신혼의 행복은 각별했지만 그래도 연극 선교사역은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어쩌면,   마음의 안정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였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그 해 늦가을,'루터'의 재공연을 마친 후,계성여고 안에서 궁지에 몰려있던 필자에게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 준 사건으로 연결된다. 가톨릭 재단의 눈치를 보며 불편해하던 참에 예상치 못한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화여고에 재직하고 있던 미술대학 동기로부터 미술교사 자리가 났는데 옮길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한국 여성 신교육의 효시이자 요람인 명문사립고,감리교 재단의 이상적인 미션스쿨 이화여고. 그 꿈의 학교가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여호와 이레'였다! 그렇게 해서 1984년 초부터 이화여고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화여고로의 전근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게다가 옮긴 지 2년 만에 이화학원 개교 1백주년을 맞게 됐으니 일복이 터져도 제대로 터졌다. 1백주년 기념행사로 이화 미술대전,뮤지컬 공연,교사 연극 공연 등을 주도했고,그 밖에도 청소년 연극제에 참가하는 성극반을 지도하고,여름방학 때마다 전교생 해양 훈련프로그램 진행을 도맡았으며,가을에는 미술 전시회,겨울에는 '빈방' 공연 등으로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언제부턴가 신앙과 삶에 관한 질문이 많아지면서 논리적으로 답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신경정신과적인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해볼 때 워낙 감수성이 예민한데다가 늦장가를 들기까지의 오랜 금욕생활,사랑하는 어머니의 별세와 그 후 바로 이어진 결혼이 가져온 정서적인 격변과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여러 신경정신과를 전전하며 검진을 해봤지만 강박신경증이라는 정도의 말 밖에는 어떤 시원스러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독한 약만 계속 먹게 됐다. 병세는 점점 나빠져서 한번 질문이 떠오르면 답이 나올 때까지 마치 동물원의 곰이 우리 안을 맴돌 듯 하루 종일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계속되는 질문들과 싸웠다. 그러다 보면 질문이 질문을 낳고 나중에는 생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서 의식의 혼란 상태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정신병원에 두 차례 입원을 했지만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될 뿐이었다. 학교와 교회,그리고 극단에서 자신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숨기려 애를 썼지만 증세는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점차 사회생활 자체가 힘들어져 갔다. 결국 1991년이 시작되면서 이화여고를 사직하고 투병에 들어갔다. 치의대생이었던 작은 처남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약을 끊었더니 이번에는 금단현상이 무섭게 목을 조여왔다.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음식을 먹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탐식증이 생겼다. 잠을 못 자니 얼굴은 해골처럼 마르고,게걸스럽게 먹기만 하니 배는 불룩 튀어나온 모습이 영락없는 몬스터였다.
 
'아,이러다 죽는가보다…' 절망이 밀려왔다. 평소 침착하고 의지가 강했던 아내도 약에 취해 교무실 바닥에 쓰러진 채 잠들어 있는 필자를 발견하고는 통곡을 할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교우들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하용조목사님을 비롯해서 문화선교를 하면서 교분을 나누었던 고명하신 목사님들이 안수해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면서 마침내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빈방' 공연만은 한 해도 거르지 않았으니 돌이켜 생각해봐도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다. 필자에게 연극선교는 소명이었다.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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