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sogno, o realta?'

'E sogno, o realta?'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방 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13일(금) 16:53
나의 30대가 그렇게 숨가쁘게 지나가다 보니 결혼과 같은 인생의 중대사도 생각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주변 친지들의 강요로 숱하게 많은 선을 본 것도, 몇몇 자매들로부터 진지한 구혼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나의 열정을 잠재울 만큼 내 마음을 빼앗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담임목사님께서 결혼이 더 늦어지면 집사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을까.
 
여기서 잠시 필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6살 때 경찰관이셨던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급전직하한 가정을 홀로 지탱해 나가시면서 네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시느라 여생을 온전히 희생하셨다. 정부에서 약간의 국가유공자 유가족 수당과 자녀학비 감면혜택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두 누이는 돈 적게 드는 사범학교에, 형은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음식솜씨가 빼어나셨던 어머니는 강릉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성광식당'이라는 일종의 기사식당을 운영하셨다. 특히 국밥과 비빔밥의 맛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식당사업의 번성도 오래 못가고 채권, 채무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시던 어머니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셨다.
 
한편 강릉 외삼촌 댁에 더불어 살면서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마친 나는 가장 늦게 서울로 올라가 식구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급격히 가난해진 환경 탓에 어느 부유한 사업가 부부에게 양자로 입양되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며칠 만에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그후로도 노점상을 비롯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말년에 원하지 않는 암을 얻으셨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한테 전도를 하지 않는 것과 며느리를 보게 해드리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불효라고 생각해서, 혼자 간절히 기도한 후에 먼저 어머니께 복음을 전했다. 시종 진지하게 들으시던 어머니는 마치 준비라도 하신 듯 감격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성수주일 하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셨다. 더구나 감사한 것은 위암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며느리를 보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나는 비록 배우자로 확신은 없었지만 틈틈이 교회 안에서 교제하고 있던 한 자매에게 결혼의 뜻을 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동숭교회 교우들과 계성여고 교직원들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순조롭게 마쳤지만 막내 사랑이 지극하셨던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공허감과 죄책감이 뒤엉키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커다란 위안을 안겨 주셨다.
 
소설의 한 장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서구형의 아름답고 키 큰 처녀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내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의 가사처럼 정확하게 "E sogno, o realta?"(이게 꿈이냐, 생시냐?) 였다! 그리고 내 마음의 빈방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레 가장 의미 있는 방문자를 맞게 된다. 내 나이 37세 되던 1982년의 일이다.

최종률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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