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젊은이, 루터

성난 젊은이, 루터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26일(월) 15:51

창단공연을 어렵사리 마친 후 미처 쉴 새도 없이 단막 성극을 가지고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어느새 두 번째 정기공연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순회공연과는 달리 많은 예산과 높은 기획 역량을 요구하는 정규 극장 공연은 그만큼 부담스러운데도 말이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는 이미 '루터'라는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곡 '루터(Luther)'는 오래 전에 외국서적 전문서점에서 발견하고 흥분해서 충동구매 했던 원서였다. 2차 세계대전 후 기성세대의 허식적인 가치관에 저항했던 젊은 작가들,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an)'의 기수격인 영국 극작가 존 오스본(John Osborne)의 작품이다.(그의 대표작인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Angry Young Man'이라는 이름이 파생된 것으로 안다.)
 
중세 기독교 역사의 핵심인물인 마르틴 루터를 교황권이라는 낡은 질서에 저항하는 '성난 젊은이'의 관점으로 묘사한 대서사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번역을 해야했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번역에 도전하다 보니 고전의 연속이었다. 우선 루터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했고 성직과 봉건사회 안에서 요동치는 미묘한 권력의 역학관계, 다양하고도 생소한 명칭과 전문용어들, 긴 호흡의 웅변적인 대사들, 시적 은유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여러번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발동했다. 해결이 잘 안되는 부분은 영문학 전공자에게 자문해 가면서 마침내 번역을 끝냈을 때는 해방감과 성취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원작이 구세대의 부도덕한 가치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저항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무게 중심을 옮길 필요를 느끼고 부분적으로 각색을 시도했다.
 
대본을 만들고 난 다음에는 제작비를 마련하는 일에 매달렸다. 기도하던 중에 우선 루터교단 총회를 찾아가 호소해 보기로 작정하고 기획자와 함께 달랑 기획서 한장만 들고 예고도 없이 한남동의 루터교총회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때마침 총회장 지원상목사님이 자리에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작품 내용과 공연 의도, 제작일정 등을 설명드리자 진지하게 들으시더니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튿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총회 사무실을 다시 찾은 우리 앞에는 액면가 백만 원 짜리 빳빳한 수표 한 장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놓여있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보면 그것은 분명히 거금이었다. 신원도 확실치 않은 두 청년의 말만 듣고도 모든 걸 믿어주시고 선뜻 제작비까지 지원해 주신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몰라서 용감했던 청춘들은 그렇게 성난 젊은이 '루터'를 건드렸고 맨정신으로 보면 너무 버거운 상대에게 아예 "맞짱을 뜨자"고 겁 없이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청춘은 가끔 무모하고 엉뚱하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나보다.

최종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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