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무대와 키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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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방이야기(15)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24일(화) 14:35
건강이 안 좋으신 모친을 대신해서 치과대학에 다니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녀가 영락교회에서 동숭교회로 옮긴 직후 우리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 근처 마로니에 공원의 한 레스토랑에서 첫 데이트를 하던 날, 우리는 마치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얘기는 주로 내가 했고 그녀는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은 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예술가적인 방황과 픽션 같은 삶의 경험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배경과 연극선교에 관한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들려줬다.
 
나중에 듣게 된 그녀의 고백은 그 날 꿈꾸는 소년 같은 나의 이미지가 좋았고 결국 배우자로 낙점하기까지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현실을 모를 수가! 속된 표현으로 예술이 밥 먹여주나? 하나님께서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신 것이 분명했다. 사실 당시 그녀에게는 열렬히 구애를 하던 화려한 스팩의 전도양양한 남자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나이 차이가 무려 9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점점 더 끌렸고 짧으면서도 꿈 같은 연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쁜 나의 일과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을 오래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오히려 서로를 갈망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가끔 극단 증언의 '빈방' 지방순회 공연 길은 두 사람에게 사랑을 키우는 알찬 기회를 제공했다. 단원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배려를 등에 업고 둘은 오가는 차 안에서 밀어를 나누었고 단원들은 상황에 맞추어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들을 톡톡히 했냈다. 괜히 배우들이겠는가.
 
그해 겨울이 되고 '빈방' 두번 째 공연의 막이 올랐다. 개막시간이 다 됐는데 아직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노심초사한 나는 연출자의 권력을 남용하여 개막을 미루는 횡포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정시로부터 10분이 지나고 더 이상 지연시키기 곤란해지자 할 수 없이 무대감독에게 개막지시를 내리고는 실의에 잠긴채 고개를 묻고 그냥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객석조명이 꺼지고 무대를 밝히는 첫 조명의 누광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객석을 다시 살펴 봤을 때 객석 맨 뒷좌석에 우아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녀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희 백합 한송이가 시야로 빨려들어왔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랑에 눈이 먼 노총각 연출자에게 이미 공연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요, 한심한 연출자가 어디 또 있을까. 자격미달도 한참 미달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직 추위가 풀리기도 전인 2월에 둘은 동숭교회의 박승은 담임목사님을 찾아뵙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예식 당일은 교우들과 계성여고 교사들, 제자들, 친척, 친지들, 연극인들로 북적댔다. 신장의 현저한 열세를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려고 신부는 굽없는 실내화를 신었고 신랑은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키 높이 굽을 달았다. 과분한 아내를 통해 위안과 행복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혼례를 못 보시고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대한 죄송스러움과 회한이 한데 얼섞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록 신혼살림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인형처럼 예쁜 첫 딸 예랑이('예수사랑')와 연년생으로 낳은 아들 예람이('예수의 사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하늘의 축복이었다.

최종률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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