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화-닫힌 교회', 소수자 불평등 여전

'열린 문화-닫힌 교회', 소수자 불평등 여전

[ 선교여성과 교회 ] 교회 내 여성의 역할 확장 完

김호경 교수
2022년 05월 10일(화) 16:45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선교여성의 날 예배에서 기도하는 회원. / 한국기독공보DB
'사이'는 공간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 떨어진 거리나 시간적으로 어떤 때에서 다른 때까지의 동안을 뜻하는 것으로, 개체들의 관계를 의미하거나 그 개체들이 모여 이루는 한정된 범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inter'나 'intra'의 의미를 갖는다. '인터'는 'between'의 뜻으로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중간, 또는 관계, 상호성을 의미하며 '인트라'는 'within'으로 어떤 것의 일정한 범위, 안, 내부 환경을 의미한다.

'인터'는 관계 맺기의 기능과 효과, 관계와 매개를 강조하는 반면, '인트라'는 범위형성 및 환경조성, 구조와 환경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인터넷 효과와 인트라 환경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와 너 사이에서의 '사이'는 '인터'의 의미이며, 우리 사이에서 '사이'는 '인트라'의 의미이다.

그러나 '나-우리'가 직접 연결되면 그것은 닫힌 사회를 형성한다. '우리'라는 사회적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나=우리'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너'에 대한 인식을 결여시킨다. 이것은 '인트라'의 배타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나-너-우리'가 연결될 때 그것은 열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추상적이지만 '너'는 실체적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추상적인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 열 줄 아는 개체들로 구성된 다원화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인터'의 관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되기를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의 사회도 그렇지만 교회도 역시 열린 문화와 닫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바꾸지는 않는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다른 것이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형태이다. 겉으로는 다른 것들을 수용하는 듯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본질은 매우 폐쇄적이다.

배타적 본질과 다문화적 모습이 혼재돼 있으며 복음을 실질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열린 문화-닫힌 사회' 혹은 '열린 문화-닫힌 교회'의 현실에 직면해 있다. 약자 혹은 소수자의 문제가 여전히 불평등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기존의 주류 중심적 시각을 거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기존에 통용되는 기준을 누가 만들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기존의 상식에 도전하고 되묻는 것이 소수자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은 불쌍하지만 집단은 불온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누구와 함께 꿈 꿀 것인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우상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로마서 14장 19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말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곧바로 20~21절로 이어진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0~21)

화평을 위해서라면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10장 29~31절에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다.

여기서 바울의 해법도 분명하다. 모든 것을 유익하게 하고 모든 것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10:23) 배려해야 할 것은 바로 남의 양심이다. 더욱이 약한 사람의 양심이다. 그가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그 보잘 것 없는 자는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사신 자이기 때문이다(8:11).

김호경 교수 / 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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