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침묵했을까

그들은 왜 침묵했을까

[ 인문학산책 ] 55

임채광 교수
2022년 05월 04일(수) 15:33

유대계 독일 철학자 프롬.

제2차 세계대전에 유대인의 학살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히틀러 치하에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독일 국민들이었다. 당시 전쟁으로 민군 합산한 독일인 사망자가 569만명에 달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폭정에 동의 또는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일반 노동자와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어용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기까지도 하였다.

1933년 3월 5일에 있었던 공화정 선거 직전에 수백명의 교수와 대학 연구자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통한 독일 정신세계의 발견"이란 문서에 서명한다. 이들 중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슈미트(Carl Schmitt), 게엘렌(Arnold Gehlen)등 많은 학자들이 나치당에 입당하여 전쟁 이후까지 당원 신분을 유지하였고, 더 나아가 파시즘 정치조직을 지지하고 이념적으로 엄호하였으며 국가사회주의 교수협의회(NS Dozentschaft)를 결성, 운영하였다.

일부 어용학자들은 권력에 협조한 대가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 묄렌도르프(Wilhelm von Mollendorff)를 전 집권당이었던 사민당(SPD)이 임명했다는 이유로 해임하고 하이데거를 임명하자 그는 기꺼이 수락하였고, 취임 연설 중에 히틀러 지지자들의 정치구호였던 "Heil Hitler(히틀러 만세)"라고 외치고 마무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스승인 후설(Edmund Husserl)을 비롯하여 야스퍼스(Karl Jaspers), 아렌트(Hannah Arendt) 등 그와 교류하였던 유대계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였다.

게엘렌도 나치에게 협력한 대가로 이득을 챙긴 사상가 중 한 명에 속한다. 신학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이었던 틸리히(Paul Tillich)가 히틀러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박탈당한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정교수직을 게엘렌은 29세의 어린 나이에 획득한다. 그 후 라이프치히대학을 경유하여 1938년에는 오래전 칸트가 임직한 이래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들을 중심으로 계승해 왔던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철학과의 영광스런 바로 그 교수직에 임용된다.

나치 정권은 1933년 치러진 공화정의 의회 선거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권력이었다. 정치질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따라 절차적 정당성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 그리고 전쟁의 공포는 무수히 많은 지식인들이 경고했었다. 그러나 독재자의 선출은 그 경고음이 무시된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독재정권은 7500만의 독일국민의 고통이자 자해행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이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 폭력으로, 고문과 학살로 죽고 폐허가 된 전쟁의 상흔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치유될 수가 없었다.

민주정치의 구동력은 구성원의 욕구에서 나온다. 정치적 욕구는 실천을 통해 구현된다. 그런데 무려 12년간 유지된 히틀러의 통치 체제에 대하여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 그들은 단순히 피해자가 아닌 제도적 폭력의 가해자로 변해 있었다. 오히려 유대인과 집시, 동성애자들이 소위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고 있을 때 침묵하고 동조했으며,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왜일까?

나치스 정권의 폭력을 규명하는 다양한 시선이 있다. 이들 중에 프롬(Erich Fromm)은 히틀러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실존적 지위와 폭력성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한다. 1964년에 집필한 '인간의 마음'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프롬은 "폭력성"의 유형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의 폭력적 행태는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유희적 폭력"과 "반응적 폭력", "복수의 폭력", "보상의 폭력" 그리고 "살생의 폭력"이다.

프롬은 인류의 역사를 '폭력의 역사'로 규정하고, 폭력의 뿌리를 인간의 심리구조에서 찾는다. 정신분석학은 마음의 내부를 분석, 해명하기 위한 유효적절한 수단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폭력성은 인간의 '퇴행의 원리'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권위주의적 성격"과 연동되어있는 성격체계이자 행동방식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퇴행"이기에 치료돼야 할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히틀러와 독일 국민의 태도는 극단적 병리현상의 한 사례이다. 그렇지만 단지 그 당시의 제한적 상황의 경우라고 단정할 수 없다. 권위주의적 심리행태와 삶의 태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폭력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체계는 다섯 가지로 나뉜다. '수용지향성 성격', '탈취지향형 성격', '저장지향형 성격', '애사지향형 성격' 그리고 '시장지향형 성격'이다. 이 요소들은 현대사회의 폭력을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핵심 인자들이다. 이를 극복하고 폭력적 사회와 결별할 수 있는 묘책은 철학과 인류의 지성이 추구해 왔던 상생과 공존의 가치, 자유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과 진정성 있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우크라이나를 위해, 미얀마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해.

임채광 교수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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