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광주 선교 본격화…북문안교회와 오웬기념관

20세기 초 광주 선교 본격화…북문안교회와 오웬기념관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의 여전도회 ③

한국기독공보
2022년 12월 20일(화) 09:51
오웬기념각.
광주 시가지 안에는 큰 교회당이 ㄱ자 모양의 기와집으로 세워져 있었다. 1902년 복음에 불탔던 목포의 젊은이들이 광주에 터를 잡고 전도하기 시작한 이래 선교사들이 목포에서 광주로 대거 이주해 옴에 따라 광주 전도가 급속한 속도전을 내게 된 것이다. 북문안에 세워졌다고 해서 지명을 따 북문안교회로 이름 지었고 광주 지역의 모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광주 북쪽의 외곽 변두리에 있는 교회보다 광주 시내 안에 있는 유일한 이 교회를 북문안 교회라기보다 그저 광주 교회로 불렀다. 1912년 8월, 김윤수와 최흥종 두 사람이 장로 장립을 받음으로 명실상부한 조직 교회로서의 위상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1913년 조선 전라 노회록에는 단지 광주교회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광주 내에 유일무이한 교회인 탓이다.

북문안교회는 주일에 세 차례에 걸쳐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선교부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조선인들의 자립 정신 아래 자체 헌금으로 교회당을 짓도록 유도했지만 유독 북문안교회만큼은 선교부에서 많은 보조를 했다. 양림동 선교부와 북문안교회는 그런 점에서 광주 기독교의 살아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그들이야 말로 무지몽매하고 억압받던 조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거룩한 초대를 목격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광주 인근 수십 수백의 마을과 시골들로 다니며 복음의 나팔수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이 감사와 즐거운 마음으로 전도인의 축복을 목격한 증인들인 셈이다.

1904년 인구 7000명에 지나지 않던 광주에 선교부가 들어선 이래 40년이 채 안 되어 인구 5만을 헤아리는 거대 도시로 자라게 되었다. 광주에 오웬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1915년 1월의 일이다. 오웬 선교사는 장흥 지역을 순회 사역하다 1909년 4월초에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신 호남 선교, 특히 전라남도 지역의 지평을 열었던 분이다. 그의 사후 가족들이 기금을 보내 양림동 한복판에 현대식 건물로 기념관이 세워졌다.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면서 오웬기념관은 문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지역별로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 절대 부족한 시점이었다. 보통 열흘씩 전개되던 성경공부에는 영광, 담양, 곡성, 순천, 화순 등 인근 각처에서 침구와 먹을 것을 머리에 이고 복음에 목마른 영혼들이 이곳에서 침식을 함께하며 하늘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꾸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달(月)성경학교는 매우 이색적인 이름으로 모이던 성경학교였다.

당시 전기나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인지라 매월 셋째 주간에는 만월로 달이 밝은 때가 먼 거리를 이동하기도 쉽고 위험을 덜 수 있어 달 성경학교, 달 전도회라는 이름으로 회집을 가질 때였다. 달 성경학교 모임의 부흥은 한 달씩 계속되었고 이런 모임에 열 차례 정도 참석해야만 졸업장이 주어졌다. 표현만 다를 뿐 요즈음의 성경학교와 제자 훈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호남 선교의 효시인 전라북도 전주와 군산 지역에서는 많게는 700명의 달 성경학교 등록자가 있었다. 전라남도에서는 대개 100명 내외의 학생들이 모였고 쉐핑 선교사가 이일학교를 열었던 1920년부터는 300명을 웃도는 여성들이 침식을 함께 하며 성경공부에 열을 올렸다. 1930년 3월에 열린 부인조력회 성경공부 모임에는 15년 만에 가장 많은 500여 명의 부인회원이 참석했다.

1927년 수피아여학교에 미국 부인조력회가 창립 감사 헌금으로 지어준 윈스보로홀이 세워질 때까지 오웬기념관은 광주 문화의 산실이 되었다. 윈스보로홀은 세워질 당시 한국 내에서 난방 시설이 갖추어진 유일한 서구식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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