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열정

[ 주간논단 ]

이월식 장로
2022년 05월 10일(화) 07:49
얼마 전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이란 영화를 봤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참혹한 처형이 과연 존재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에게 저러한 참상을 어찌하여 허락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열정과 예수님의 열정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열정'은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다. 즉 열정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도 사랑이시다.(요일 4: 7~21)

산에 오른 사람이면 반드시 그 산을 내려와야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항존 직분자는 출생 나이에 제한을 받는다. 은퇴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강제로 은퇴를 당하셨다. 죄인들의 손에 의하여 조롱과 멸시로 불명예스럽게 말이다.

'사명'이라는 산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나이가 남아있던 모세도 느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내려놓는 은퇴를 했다. 영어로 은퇴는 '리타이어(retire)'라 하여 헌 타이어를 새 타이어로 바꿔 끼고 다시 출발한다는 의미다. 은퇴 대상자는 분명 '헌 타이어'가 된다. 특별히 목사와 장로에게도 은퇴를 전후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그 결과가 세상과 기독교계에 자주 회자된다.

산에 오를 때는 뒤에서 등을 밀어주면 참으로 고맙다. 그러나 하산할 때 뒤에서 등을 밀면 문제가 발생한다. 넘어지거나 낙상으로 이어진다. 때로 교회에서는 은퇴 문제를 놓고 예민해지기도 한다.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호적에 기인하여 법적인 보호로 그 시기를 결정하는데, 교회에서의 은퇴는 가끔 '출생 나이가 정년이 되었는데 은퇴를 안 한다'고 도덕성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있다. 맞는 말이다. 호적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뒤에서 등을 미는 형국'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등 떠밀려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는 기분이다. 앞에서는 '목사님, 목사님', '장로님, 장로님' 하면서 은퇴 시기가 되면 그 태도가 쉽게 바뀌어 심지어 인간사 신의를 저버리는 배신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다.

은퇴 예우에 관하여 문제도 있다. 사회법은 명확한 법적 기준이 있어서 그대로 시행하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교회는 다르다. 교회마다 각각 형편, 기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마다 민감하다. 교회는 은혜가 있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존재한다. 사랑과 존경과 배려가 없는 은퇴 예우라면 차라리 세상 기준에 맞는 세상법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은퇴 예우로 불거진 문제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는 되지 않아야 한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가. 명예, 권세, 부귀, 영화도 생명보다 높지않다. 십자가의 열정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 앞에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앞에서 어떤 변명이 필요할까. 얄팍한 인간의 속성을 아시는 주님은 우주적 사명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우주적 사명 앞에 서신 주님은 판단하셨고 또 그대로 행하셨다. 이것이 지상 최대의 사랑이고, 그 실천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열정을 한 번쯤 총정리해 봄이 어떨까? 남겨진 헌 타이어의 열정이 있다면 그 자체로 다시 새롭게 주님이 허락한 생물학적 나이에 걸맞은 열정을 다시 시작하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 있다 "결코 끊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삶을 살아라".

살아 있는 동안 열정에는 쉼이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해서 중간에 내려서는 안된다. 종착역은 천국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사랑이다. 우리도 사랑의 열정을 굳게 잡자. 그 목표가 있는 열정은 성취되어야만 끝이 난다. 열정은 죽어야 끝이 난다.


이월식 장로 / 부총회장·경기중앙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