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출발은 '엉성'으로부터

'영성'의 출발은 '엉성'으로부터

[ 주간논단 ]

유해룡 목사
2022년 03월 29일(화) 08:20
20여 년 전에 필자가 한국 칼빈학회에서 '칼뱅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다. 발표 후 회중들 사이에서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의 방향은 필자의 예상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히 칼뱅에 대한 필자의 견해나 이해에 대한 반론 혹은 보완적 주장이 나올 법한데, 논의는 "도대체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논란으로 흘러갔다.

필자의 논문에서 이미 그 의미를 밝힌 바 있지만, 그 정의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논란은 매우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그 토론은 지속되었다. 중지가 모여지지 않을 듯한 토론의 분위기를 지켜본 한 중견 칼뱅학자가 거들었다. 나는 영성의 전공자가 아니니, 필자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늠할 수 없으나,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영성'의 반대말인데, 그것이 '엉성'이라고 일갈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논란은 거기서 끝났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성의 반대말이 '엉성'이라. 그 말에는 어느 정도의 농이 섞인 말마디이기는 하나,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 즈음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회자되고 있었다. 불현듯 뛰어든 듯한 이 주제에 대해 교계나 신학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던 때였다. 이런 때에 '영성'의 반대말이 '엉성'이라는 말은 필자에게 전광석화와 같은 통찰력을 안겨주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성'이라는 말을 누가 교계와 신학계에 뿌렸는가? 전공자들인가? 그렇지 않다. 말은 시대에 따라서 태어나고 죽는다. 죽었던 말도 필요하면 다시 소환된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알려주고, 미래를 전망하는 예언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말은 언제 누가 유행시켰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교계와 신학계 전반에서 회자되었다. '영성의 반대말이 엉성'이라는 말은 바로 영성이 왜 이 시대에 회자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들려왔다. 시대와 교회가 반듯하게 성장하고 있었다면, 이 말은 등판할 필요가 없었다. '엉성'한 오늘의 상황을 바로잡고자 하는 하나의 화두로 '영성'이라는 말이 태어났다.

사실이 그러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자는 '영성'에 관련한 각 분야의 연구논문을 연구한 바가 있다. 각 분야 즉 실천신학, 조직신학, 성서신학, 교회사 등에서 사용된 영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 동안 발표된 수십 편의 논문을 들여다 보았다. 결론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은 무성하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실한 나무가 되었으니, 무엇인가 새로운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이 부가적으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니, 본래대로 돌려놓자는 의미로 그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인 '근원으로(Ad Fontes)'라는 말과 맥을 같이하는 의미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논란하기보다는 왜 그 말이 소환되었는지를 물으면, 의혹이나 의문이 상당히 해소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이 부담스럽게 여겨진다면, 그 말에 상응하는 적합한 다른 용어나 대안을 찾아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말이 지향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래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달라는 교회와 시대의 외침에 귀를 열어둘 수 있다.

유해룡 목사 / 모새골공동체교회·장신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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