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기독교 여성, 전도부인 활동으로 지역교회 생겨"

"무명의 기독교 여성, 전도부인 활동으로 지역교회 생겨"

[ 선교여성과 교회 ]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전도부인 ④

김은정 박사
2022년 03월 09일(수) 08:01
3.1운동 103주년을 기념해 나라를 위해 기도한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DB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알렌 부인 다음으로 내한한 헤론 부인(Harriet Heron)의 성경반에서는 공식적으로 2명의 전도부인이 배출되었다. 할머니(halmonie)와 관우물골 신 부인으로 알려진 두 명의 전도부인은 한국 여성의 상황과 선교회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활동을 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성의 외출을 제한하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내외법이라는 관습 때문에 여성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외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예외적 여성으로 자유롭게 마을과 마을 사이로, '양반'과 '상놈'사이로 다니며 전도활동을 했다. 게다가 그는 한의사(old native doctor)로서 오랫동안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신분의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우물골에 사는 신 부인은 헤론 부인의 하녀로 고용되어 기독교를 접하고 신실한 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정신여학교의 교사에서 첫 번째 한국인 교감이 된 신마리아와 동일 인물이다.

처음 두 명의 전도부인 외에도 서울 지부에서 오랫동안 존경받은 다동의 김 부인과 잔다리의 고 부인은 사례를 거의 받지 않고 자원해서 전도부인 역할을 한 대표적 초기 기독교 여성들이다.

다동의 김 부인은 서울 명문가의 과부로서 백정의 집을 심방하고 함께 어울려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운동 이후에 친척들의 태도가 바뀌어서 며느리를 교회로 데리고 올 만큼 관용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또 그의 친척 중 한 명은 제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나서 개종하고 승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잔다리의 고 부인 역시 부유한 중상류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함께 지게에 전도문서를 지고 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했다. 그의 집은 사경회 장소로 개방되었고, 종종 선교사들이 와서 언어공부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고씨 부부의 변화를 보고 기독교에 호감을 갖게 된 친구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친구는 김포에 사는 유공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했다. 차재명의 교회사기에는 김포읍교회의 설립자로 고군보와 박산라미라고 고씨 부부의 이름을 특정했다. 고 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강변 마을을 두루 다니며 전도하고 여선교사의 순회사경회에 함께 다니며 여성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전도부인 외에도 무명의 기독교 여성들이 서울 곳곳에서 자원하는 전도부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지역교회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1895년까지 서울에는 정동 바깥에 여성들이 모이는 장소가 관우물골(관정동), 곤당골(소공동), 홍문섯골(홍문동), 인성붓재(인현동), 연못골(연동), 독립문 앞 전도관(서대문 밖) 등이 있었고, 이 모임과 연결되어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남대문교회 등 초기의 장로교회들이 발전했다. 또 여성모임은 마포, 고양, 행주, 김포, 뚝섬과 왕십리, 양평, 안성, 장호원 등 경기 지역과 배천, 은율, 장연, 해주 등 황해 지역에 사경회를 개최하는 여선교사와 전도부인의 활동으로 확산되었다.

정신여학교의 주요인물이자 장로교회 여전도회 전국 연합체를 만드는 데 기여한 김필례의 어머니는 소래의 김 부인으로 알려진 유명한 전도부인이었다. 그는 황해도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했다. 역시 양반가 과부로서 여행과 이동의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었지만 여선교사들의 순회여행에 동행하면서 혼자서 백령도까지 가서 전도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의 결실로 그 섬에는 중화동교회가 세워졌다.

김은정 박사 /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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