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부인'의 기원, 미국 '바이블 우먼 제도'

'전도부인'의 기원, 미국 '바이블 우먼 제도'

[ 선교여성과 교회 ]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전도부인 ③

김은정 박사
2022년 03월 02일(수) 11:19
사진은 2월 22일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44회 미래지도자세미나. / 한국기독공보 DB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문서를 발굴해서 아시아에서 활동한 바이블 우먼의 사례를 연구한 장성진은 매서부인을 전도부인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캐나다와 호주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 온 선교사들이 고용한 매서부인보다는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여성선교운동에서 활용한 바이블 우먼 제도가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전도부인으로 정착했다고 본다.

일본, 중국과 같은 아시아 이웃 나라에서는 1870년대에 단순한 매서활동을 넘어서 목회 능력을 갖춘 바이블 우먼이 활동하고 있었고, 조선에 온 여선교사들은 선교정보의 교류를 통해 그 제도의 유용함을 잘 알고 있었다.

초기 내한 여선교사들은 미국 남북전쟁 전에 시작된 여성교육운동과 여성선교운동의 영향을 받은 어머니 세대가 길러낸 딸들이었다. 먼저 부인선교사들이 남편과 함께 내한했는데 알렌 부인 다음으로 내한한 헤론 부인(Harriet Heron)은 고향에서 교사와 어린이선교회 지도자로 일한 경험이 있었지만 직접 선교사로 지원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 왔다.

위험한 개척 선교지에 독신여선교사를 먼저 보내는 법은 없었다. 의료선교를 위해 들어온 애니 엘러스(Annie Ellers)와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은 전문직 독신 여선교사로 선교현장에서 와서 남자선교사의 지휘 아래 의미있는 선교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결혼을 통해 결과적으로 선교사 사회에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891년이 되어서야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독신 선교사 인력을 충원받아 여성사업을 공식화했다. 그 후 10년간 여성사업을 관리, 감독한 독신 여선교사들은 대부분 장로회 계통의 파크 대학(Park College) 출신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여성선교운동이 일어난 지 한 세대 후에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VM)'이 대학생들을 해외선교의 열정으로 휘감았는데 파크 대학도 이 운동의 자장 안에 있었다. 파크대학은 여선교회와도 연결되어 월례 기도콘서트를 합동으로 열기도 했다. 이 학교출신인 메리 헤이든(Mary Hayden), 수잔 도티(Susan A. Doty), 마거릿 베스트(Margaret Best)는 북장로회 여성사업의 중심인 여학교와 여성경학교의 토대를 닦았다.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교파 간 경쟁을 피하고 전통의 저항이 강한 서울보다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지방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주요 개항지에 지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부산, 원산, 평양에 차례로 지부를 열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곳은 평양이었고, 나머지 두 곳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원산은 1898년 캐나다 장로회에, 부산은 1914년 호주 장로회에 넘겨주고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해방 전까지 서울, 평양, 대구, 선천, 재령, 강계, 청주, 안동, 만주에는 신빈 지역은 북장로회 구역으로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북장로회의 전도부인은 선교회가 가장 먼저 선교활동을 시작한 서울에서 나타났다. 선교회 통계와 헤론 부인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8년부터 서울에서 바이블 우먼을 활용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전도부인은 선교회의 고용인이라기보다는 자원활동가의 성격이 강했다. 왜냐하면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1891년부터 네비어스 정책을 채택하여 선교회 자금이 한국인에게 직접 지불되는 경우를 최소화했고,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 문제가 되는 모식신자(rice Christian)를 양산하지 않으려 했다. 선교사 한 명 당 조사(helper)는 최대 2명으로 제한했고, 신앙과 삶이 검증된 기독교인만이 선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김은정 박사 /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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