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리더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자이다

정치 리더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자이다

[ 인문학산책 ] 46

김선욱 교수
2022년 02월 09일(수) 08:07
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완성자인 헤겔은 천재가 아니었다. 헤겔은 친구인 천재 철학자 셸링보다 훨씬 뒤늦게 꽃을 피운 사람이었다. "뒤늦게 꽃을 피운"을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생계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오래 고생했다는 말이다.

헤겔보다 어렸던 셸링은 일찍 대학교수가 되어 철학적 명성을 떨쳤다. 헤겔은 셸링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가 있어야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그의 권고 때문이었다. 헤겔의 박사논문 주제로 셸링의 철학을 다루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최초의 주저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헤겔은 셸링의 철학을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을 내놓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이름은 들었어도 셸링이라는 이름을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철학적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절대자를 인식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절대자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으나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고 했다. 헤겔은 신이 역사 속에 자기를 드러낸 모습을 추적하면 철학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헤겔은 역사의 과정을 변증법적 방식으로 설명한다. 절대자의 궤적을 논리적으로 추적한 것이 논리학이며, 역사 속에 드러난 구체적 모습을 설명한 것이 '역사철학강의'이다.

셸링은 절대자와의 직접적 관계를 통해 그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헤겔 비판의 핵심은 그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리가 설명되지 못한다면, 진리의 이름으로 기만이나 독단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확언만으로는 곤란하다. 진리는 순간적으로 척하니 알아차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체계적 설명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헤겔은 그 체계적인 설명의 내용과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변형된 정치철학이라고 했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나폴레옹을 예로 설명한 '이성의 간지(奸智)'라는 개념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욕과 정복욕에 따라 유럽 정복을 실행에 옮겼지만, 역사를 이끄는 절대자는 나폴레옹의 욕망을 이용해서 유럽의 구(舊)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근대적 정치질서가 생겨나게 했다. 절대자의 본질은 이성이고, 역사는 이성이 현실로 되는 과정이다. 이성은 개인을 이용하는 간교한 지혜(간지)를 부려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낸다. 역사를 통해 진보하는 것은 자유이다. 이것이 헤겔 역사철학의 핵심이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영웅은 시대의 변화를 남보다 먼저 읽어낸 자이다. 헤겔의 영웅은 오늘날 정치 리더에 해당한다. 정치 리더는 자신이 통찰한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열정을 다한다. 평범한 사람은 리더의 시대적 통찰을 이해하지 못하고 리더의 열정만 본다. 그래서 그들은 리더가 권력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일 뿐이다.

리더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헤겔이 보기에 영웅의 삶은 평온하고 유유자적한 것이 아니라 악전고투로 점철되어있다. 오직 열정이 그 삶을 이끌어간다. "종의 눈에는 영웅은 없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종은 영웅의 장화를 벗기고 침대를 돌본다. 종의 눈에는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신이 그를 위해 돌보고 있는 작은 일들만 보인다. 그래서 헤겔은 덧붙인다. "그것은 그 영웅이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이 종이기 때문이다."

영웅은 미래를 통찰하는 자이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 리더는 통찰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리더는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리더는 합리적인 설득을 요구하는 시민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은 시민이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정치 리더가 역사의 변화를 통찰하고 있는지, 자기 행복을 추구할 뿐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시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지, 혹은 단지 선언만을 일삼는지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말의 진실성을 그 자신의 과거의 실천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내 이익 때문에 정치 리더를 선택한 시민은 제 이익에 몰두하는 정치 리더에게 모든 것을 잃게 마련이다.

김선욱 교수 / 숭실대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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