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위로

길 위에서 만난 위로

[ 기독교영화보기 ] 영화 '노매드랜드'

김지혜 목사
2021년 12월 16일(목) 10:00
"2008년에 집 왕창 사놨으면 큰 돈 버는 건데. 부동산은 결국 오르게 돼 있어."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이 언니 부부의 집에 들렀을 때, 언니 부부의 지인들까지 함께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펀의 형부와 지인들은 아마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부동산 투기로 상당한 수익을 본 듯하다. 누군가 부동산으로 시세 차익을 얻는 동안 누군가는 집을 잃고 삶으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영화에서 펀은 남편이 암으로 죽고 난 후, 머물던 집을 뒤로하고 낡은 RV차량에 홀로 몸을 실었다. 길을 가는 동안 차는 이동하고 머무는 공간 이상의 스위트홈, 곧 '집'이 되었다. 우연히 만난 옛 제자가 집이 정말 없냐며 질문하자 펀이 답한다. "집이 없는 건 아냐. 거주할 곳이 없는 것과 집이 없는 건 다르잖아.(I'm not a homeless, I'm just houseless.)"

원작 '노마드랜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에서는 지금을 "새로운 은퇴자들의 시대"라고 말한다. 전자 기기를 활용해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디지털 노매드(유목민)라는 신조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얼마 전인데, 저자 제시카 브루더는 미국 경제가 붕괴되면서 늘어난 현대판 노매드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3년의 시간에 걸쳐 취재해 책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평생 성실하게 일하고, 심지어 전문직 중산층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기도 했던 이들의 삶이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가, 라는 물음은 노후에 대한 한국인들의 염려와도 그리 멀지 않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택한 대안은 생활비에서 가장 지출이 큰 주거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차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은퇴 후에도 생계를 위해 아마존 물류 창고, 국유림 캠프장 등 일자리를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그러나 생존에 매몰되지 않았다. 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상징되는 자본과 욕망의 올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원작을 각색해, 금융위기의 여파로 불안정한 미래를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과거의 아픔과 이별,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삶을 치유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펀이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던 것처럼, 길에서 만난 노매드들은 제각기 사연이 있었다. 그간 쌓아온 성취, 가족, 건강을 상실하고 더 이상 기존의 삶을 버텨낼 수 없어 떠나온 길 위에서 이들은 희망을 발견하고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펀은 갇혀 있던 과거의 기억을 떠나보냈고,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힘겨워하던 밥 웰스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 아들을 기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스왱키의 바람대로 한밤중에 불가에 모여 앉아 세상을 떠난 그녀를 기억하며 불 속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노매드들은 길이 선물하는 만남과 헤어짐, 떠남과 머무름의 반복 속에서, 서로를 돕고, 노래하고, 위로하며, 기억하는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면서 답을 찾아나갔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78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 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93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수상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200여 개의 상을 받을 만큼 전 세계가 주목한 작품이다. 자본주의와 취약한 사회안전망의 그늘 아래 어두운 사회경제적 현실을 짚으면서도 그 안에서 다른 삶, 다양한 삶을 이어가고, 서로 연결되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는 감동과 여운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매드들이 연기자가 아니라 실제 길에서 살아가는 노매드들이라는 점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흩는다. 스크린으로 경험하는 대자연은 경이롭고 장엄하며, 그 광활함에 비해 미물일 뿐인 우리들의 고민은 사소한 것, 욕망은 헛헛한 것이 되고 만다. 2021년을 마무리하며 영화 '노매드랜드'가 인생이라는 길 위에 선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본다면 어떨까. 대림의 계절,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외면치 않는 위로와 용기를 안겨줄 것이다.



김지혜 목사/솔틴비전센터장, 평화나루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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