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된 프로페짜이의 역사

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된 프로페짜이의 역사

[ 말씀프로페짜이 ]

박영호 목사
2024년 09월 25일(수) 09:37
'프로페짜이'라는 '예언'이라는 말이다. 쯔빙글리가 스위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그 도시의 목회자들을 위한 모임을 했다. 처음에는 '렉션즈(lectiones)'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조직화되어 나갔고 '프로페짜이'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쯔빙글리는 개신교의 설교자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이고, 또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4장 29~31절이 근거 구절이었다.

금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7시 (동절기에는 8시)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구약성경 라틴어 번역본, 히브리어 본문,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낭독했고, 낭독한 본문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뒤따랐다. 그 후에 본문을 라틴어로 설명했고,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들을 위한 독일어 설명이 이어졌다.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끝까지 차례로 공부했고,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신약에만 집중하려는 급진적 개혁자들에 맞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개신교의 주요 설교 패턴이 된 연속본문 렉쇼우 컨티뉴어(Lectio continua)에 따른 강해설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취리히 성경도 이 모임에서 나온 번역이 기초가 되었으며, 개신교 최고의 신학교의 연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쯔빙글리가 프로페짜이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선포보다는 해석이었다. 성경의 바른 해석에 교회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1520년에 시작된 이 모임의 처음 목표는 목회자 재교육이었다. 기초 신학교육을 받고 목회자가 되지만, 말씀 사역을 계속하려면 계속되는 성경해석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쯔빙글리는 이 모임에 지역의 모든 목회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후에 지금의 고등학교 격인 라틴어학교 고학년 학생들도 참여하도록 했고, 점점 신학교의 형태로 발전해 갔다.

매일 모임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헌신을 요구한다. 모임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에게 공개되었지만, 목회자들의 경우에도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출석을 부르며 참석을 독려해야 했다. 정기적으로 하는 어떤 습관이 자리 잡을 경우 삶의 리듬과 사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종교개혁기 목회자들의 삶에서는 프로페짜이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매일 모여서 찬송하며 기도하던 성무일과를 대체하는 성격으로 여겨졌다. 처음 이 모임이 교회의 회중석에서, 혹은 교회당 앞 쪽의 성가대석에서 이루어진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도와 찬송으로 이루어진 가톨릭 성직자들의 모임은 그 자체로 끝나지만, 프로페짜이에서 나누어진 해석은 강단에서의 선포로 이어지기 때문에,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이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 온 성도가 함께하는 말씀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일에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 모임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의 프로페짜이는 대체로 일주일에 한 번 모이지만 목회자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설교자의 시계는 주일설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프로페짜이에 참여하는 설교자들은 그 시 기준으로 말씀 연구와 묵상, 설교집필 등의 시간 사용이 자리를 잡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박영호 목사 / 포항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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