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선에 의존해서만 기능한다

악은 선에 의존해서만 기능한다

[ 인문학산책 ] 37

김선욱 교수
2021년 12월 01일(수) 08:03
사람들은 선과 악이 동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마니교를 떠났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기독교는 이런 믿음을 이단시했다. 악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은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쉽게 동의한다. 이 주장은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라는 소피스트의 주장으로, 결국 악이 선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다. 이 표현이 워낙 간단명료하여 강력하게 들리긴 해도,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타격한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말은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현실주의가 현실적인 주장처럼 들리지만, 현실주의가 반드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권력자의 현실적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반론한다. 권력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통치자도 실수할 때가 있다.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법을 만들지만, 그 결과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 허다하다. 정의가 강자의 권력의 이름표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자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트라시마코스도 만만치 않게 대응한다. 그는 우리가 의사를 의사로 부르는 것은 그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병 고치는 역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제 트라시마코스는 본질론에 입각해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 의사의 실수가 아니라 의사의 본질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소크라테스도 본질론으로 응수한다. 법을 세우는 통치자의 본질적 역할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유익에 있지, 자기 이익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다시 자신의 주장을 가다듬는다. 통치자 즉 강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멋진 생각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통치자란 국가를 세우고 법을 만들어 군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통치는 협력적 관계를 요구한다. 이런 협력이 통치자의 이익을 향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통치자는 강력한 무력을 가진 소수의 조직을 통해 전체 조직을 굴복시켜야 한다. 그 소수의 조직도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려면 회유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조직을 통해 불의를 도모하려 해도 조직 내에는 반드시 신뢰나 협력이 있어야 한다. 즉, 악한 일도 선에 의존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입증하려 한 점이다.

악을 구하는 자라도 선에 의존해야만 한다. 자기의 이익만을 철저히 추구하려는 자는 조직을 배신하거나 조직에 의해 배신당해 결국 홀로 악의 제물이 된다. 악은 그 자체로는 무능하다. 악이 기능하려면 선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악은 선에 기생적이다. 기생충이 숙주가 만든 영양분을 먹고 살아가는 것처럼 악은 선이 만든 힘에 의존해서만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르게 표현된다. 악은 선의 그림자라고 한 것이다. 같은 생각이 이후의 많은 사상가에 의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했다. 예컨대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그는 악에는 뿌리가 없으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거대 악이 생각 없음이라는 평범한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사유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살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같은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악이 선에 기생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싸워 이길 힘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어렵겠지만 최선을 다해보라는 단순한 권면의 말씀이 아니다. 선에는 악을 이길 근원적 가능성이 있음이 고대에서 현대까지 철학적으로 줄곧 입증되어온 것이다.

김선욱 교수 / 숭실대학교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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