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걱정의 노래

지나간 걱정의 노래

[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 ]

이재훈 시인
2021년 02월 03일(수) 10:00
지난 연말 건강검진을 받았다. 건강검진은 연말에 대부분 몰린다고 한다. 나 또한 여러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한 자리가 겨우 남아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마치 치열한 경합에서 당첨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왜 진작 하지 않고 방정이냐는 가족들의 한심한 눈빛에 대고 나름 그럴듯한 몇 마디 말을 욱여넣었다. "코로나 시국이잖아. 병원에 가는 걸 조심해야지. 내 몸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지. 그리고 양보한 거야. 가장 늦게 하는 게 겁나서가 아니야." 말을 해놓고 나니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은 아니나 '겁나서'라는 말에 진심의 방점이 찍히는 걸 들킨 것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겁 때문이다. 주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내 살갗에 바늘이 꽂히는 상상만으로도 닭살이 돋는다. 차가운 금속이 맨살에 닿는 이물감도 싫다. 위대장내시경을 하기 위해 장세척 약을 먹는 것도 고역이라는데. 그리고 조금이라도 몸을 더 만들어서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건강한 몸으로 검진을 받는다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나 앞뒤가 맞지 않다. 며칠 운동하고 식조절을 한다고 갑자기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검진일이 다가오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감정적이 되는 것은 한 마디로 걱정 때문인 것이다. 몸이 예전과 달라. 내게 무슨 병이 있을 거야. 이런 생각들이 덫에 빠진 듯 꼬리를 물고 한동안 괴롭혔다.

누구나 겪는 건강검진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걱정은 하면 할수록 더 큰 걱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내게도 더 큰 걱정이 찾아왔다. 검진시 대장에 큰 용종이 발견되어 한 달 후 다시 소화기내과에서 내시경을 받고 용종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 그때부터 나의 모든 이성과 감성은 필사적으로 걱정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내색은 안했지만 그동안 혼자 품었던 찌질한 안쓰러움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걱정을 달고 살았다. 어른들은 큰일났네, 죽겠네, 미치겠네, 환장하겠네와 같은 재수없는 말들을 농담처럼 발설하면서 다가올 불행을 막으려 했고, 그런 말들을 늘 들으면서 자랐다. 중부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유래된 '걱정인형'도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귀신이 나올까. 오줌을 쌀까. 도둑이 잡아 갈까. 하는 걱정들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리거나, 베개를 끌어안거나, 인형을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어린 시절 가장 공포스러운 걱정은 엄마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아닐까. 기형도 시인은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엄마걱정)라고 시장에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불안을 노래했다. 시인은 어둡고 무서웠으며 빈방에서 혼자 훌쩍거렸다고 했다. 누구나 이런 걱정에 대한 원체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낮잠을 자고 나니 엄마가 없어서 오후 내내 마당에 나와 울었던 겨울날이 지금도 대낮처럼 생생하다.

공정한 걱정은 없다. 걱정은 사람들마다 감각하는 세기가 다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걱정을 자연스럽게 극복해가는 것만이 마음을 달래는 길이다. 걱정은 살아가면서 자꾸 는다. 건강 걱정, 직장 걱정, 돈 걱정, 집 걱정, 자녀들 걱정, 인간관계 걱정, 미래 걱정 등등. 나는 자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라는 성가를 흥얼거리곤 한다. 그러면 솟구치던 걱정이 사그라지곤 한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로 시작되는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도 애창곡 중의 하나다. 물론 노래가 걱정을 치유하는 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걱정을 삭이는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 울며 노래하는 사람. 읽고 생각하는 사람. 고요에 침잠하는 사람. 보고 들으며 웃는 사람. 모두 훌륭한 영적 치유자들이다. 어쩌면 이 글도 자꾸 닥칠 걱정에 대한 사후조치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대장내시경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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