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충격의 땅으로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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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편지 ] 네팔 편 1

이원일 목사
2019년 10월 15일(화) 00:00
예배를 드리고 있는 네팔 아이들의 모습.
네팔에 온지 11년이 되어간다. 시간이 많이 지나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13년 전 청년 단기팀을 인솔해서 네팔에 왔을 때의 일이다. 네팔 교회는 국가 공휴일인 토요일을 주일로 섬기고 있었다. 주일예배 때 설교하기로 했다. 우리 팀도 뜨겁게 준비하고 왔지만, 네팔 교회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는 더 뜨거웠다. 나도 뜨겁게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운데 앉아 있던 성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크심을 선포하는데, 아니라는 듯,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선교지구나'라는 생각에 더 크게, 힘 주어 말씀을 선포했다. 그런데, 아까 고개를 흔들던 사람이 이번에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어떻게 교회의 중앙에 앉아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영적 전쟁이구나 하며 더 열심히 말씀을 선포했다.

그런데 밤에 숙소에서 우리 팀을 인솔하시던 선교사님이 네팔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은 '예' 혹은 '맞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지만, 네팔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설교 중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그 성도는 열심히 말씀을 받아들이며, 동의하고 있었던 것인데, 혼자서 오해한 것이다. 설교 말씀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크심을 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다시 이해하고 나니,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고, 감격과 기쁨이 생겼다.

왜 힘이 드는 것인가? 그것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말씀을, 상대를, 인생을, 하나님을 … 이해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과 은혜였음을 이해하게 되면, 감격과 기쁨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사소통은 커녕 'Yes' 와 'No'도 구분이 안되는 타문화권에 왜 와있는가? 한 마디로 11년의 시간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고, 있을 수 있다.

나와 현지의 교회, 목회자, 일반 힌두인들을 만나게 하심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앎'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을, 신앙을, 자신을, 인생을, 연약함을, 죄를, 그리고 은혜를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문화가 달라서 충격을 받았던 곳에서 위의 것들을 더 깊히 알아가고 깨달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도 네팔에 작은 앎의 파장이 생길 것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높임 받는 역사들이 있기를 원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단기팀원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가르치고 주려고 왔지만, 오히려 배우고 받고만 갑니다", "하나님을 전하려 왔지만, 오히려 은혜를 받고 갑니다"라는 말이다. 힘을 다해서 평생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으로 일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은혜와 사랑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곳 네팔에서.

이원일 목사/총회 파송 네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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