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동편여전도회, 설립하자마자 전도 사명 감당

경남동편여전도회, 설립하자마자 전도 사명 감당

[ 선교여성과교회 ] 경남지역 여전도회 11

탁지일 교수
2024년 06월 13일(목) 03:06
1919년 3월 18일 오전 11시 동래 수안동예배당에서 경남동편여전도회 임시총회가 회원 58명이 모여 개회한다. 이날 전도인을 택하여 믿지 않는 곳에 머물며 전도하기로 하고, 그 장소를 동래군 남면 수영으로 정한 후 전도인 선정은 전도국에 일임한다.

이듬해인 1920년 3월 2일 오후 2시 밀양읍예배당에서 22인이 모여 제2회 총회를 개최하고, 수영의 전도인으로 택함 받은 윤경신이 1919년 5월부터 수영에서 전도하고 있으며, 향후 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는 전도국장 신재선의 보고를 받는다. 이어 윤경신이 구두로 수영에서의 전도 현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본인이 귀 총회의 부르심을 입어 작년 5월부터 수영에서 전도하던 중, 여자어린이들을 모집해 학교를 시작하여 그 수가 40명에 이르렀고, 학습문답까지 받은 이가 3명이며, 주일에는 50~60명이 모이고 있고, 장래에 교회로 발전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0년 12월 30일 오후 4시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개최된 제3회 총회에서, 전도국장 신재선은 윤경선의 헌신적인 전도활동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윤경신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확대한 것을 보고했다.

윤경신은 자신의 전도활동에 대해, 교인 수는 장년이 30여 명이고, 학습문답을 한 이가 7명이며, 입교인이 3명이고, 학생 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이와 함께 헌금과 건축 준비 상황도 함께 보고했다. 이어 윤경신은 그의 전도사역을 사면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총회는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허락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윤경신을 청빙하려는 서울 안국동교회 당회에 서기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윤경신은 1922년 10월 28일 서울로 돌아갔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그 설립(1907년)과 함께 제주도에 이기풍을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1912년 총회 설립 후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의 선교를 시작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조선예수교장로교회가 그 첫 사업으로 선교를 결정한 것처럼, 경남동편여전도회가 설립하자마자 그 설립 목적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 한동년 초대회장

조선의 복음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통적인 유교문화 속에서 차별받아온 다양한 계층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했던 기독교 정신이 조선에서도 감명 깊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성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백정과 종이 장로와 목사가 됐다. 전통적 유교문화에서 배척되었던 신분들이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종들이 되어, 헌신적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겼다. 부산교회여성운동의 시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경남동편여전도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이끌었던 한동년(혹은 한설향, 1874~1942)은 벨 멘지스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선교사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9~1939)에게 1910년 9월 11일 세례를 받았다.

한동년은, 수안교회 생명록에 따르면, 1911~1957년 기간 동안 수안교회에서 조사, 장로, 담임목사, 임시목사 등으로 수차례 섬겼던 김만일 목사의 부인으로 헌신적인 내조와 사회봉사활동으로 인해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한동년은 여성을 위한 사회교육과 신앙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남편인 김만일 목사의 신학공부를 후원했다고 한다.

한동년은 특별한 배경을 갖고 있다. 양반 집안 출신이었으나, 가세의 몰락으로 인해 동래부 관청 소속의 기생이었던 것이다. '수안교회 100년의 역사'는 수안교회 윤아지 권사와 한동년의 장례를 집행한 김광현 목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한동년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다.

"1903년경 서울에서 사업관계로 동래읍으로 이사 온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가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한설향은 이 집에서 꽃신을 사기 위해서 자주 드나들었다. 여기에서 호주 선교사 멘지스를 만나게 되었고, 또한 그 집에서 일하던 젊은 청년 김만일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한설향은 교인이 되었고, 그 젊은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어 그는 서울경성신학교에 진학하였고, 마침내는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뜻밖에도 그가 자기의 남편이 된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허다한 사연이 있었고, 특기할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종용했고, 이들 또한 신령한 뜻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되었다. 한설향은 세례를 받자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름을 한동년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검소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고 지냈으며, 온유하며 충성스럽고 성의 있는 여성으로 당시 지역사회에서 높이 존경받는 여성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목사부인으로서 타의 본이 될 만한 귀한 삶을 살았고, 그녀가 1942년 세상을 떠난 때에는 그 장례식이 인산인해였으며 신불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얼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의 시작에 끼친 한동년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녀의 인생 여정, 즉 기생에서 사모와 사회활동가로의 헌신적인 삶은, 조선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을 따라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신 실한 신앙인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삶 자체가 조선교회여성의 한 표상이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