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ㆍ민족의 기대 만큼 '충실한 교육'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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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계 ] 기독교학교교육硏, '…역사에 길을 묻다' 주제로 학술대회 개최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1년 10월 31일(월) 15:28
   
지난 21일 숭실대 벤처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초기 기독교학교의 활동의 집중연구를 통해 현재 기독교학교의 당면과제를 살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학교의 활동을 면밀히 살핀 학술대회가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소장:박상진) 주최로 21일 숭실대학교 벤처관에서 열렸다.

'기독교학교, 역사에 길을 묻다'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는 초기 기독교학교의 교회와 지역사회 관계, 신앙과 민족 교육, 서구 선교사와 토착세력의 영향 관계 등이 상세히 소개됐다.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연구소장 박상진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학)는 "우리나라 기독교(대안)학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학교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이미 오래전 초기 기독교학교들이 겪었던 문제들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며 "초기 기독교학교가 역사 속에서 대응했던 방식을 탐구해 오늘날 기독교학교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고 의미를 밝혔다.

첫 발제는 교회와 학교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에 대한 회고로부터 출발했다. 강연을 한 박상진교수는 "토착 한국교회에 의해 기독교학교 설립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구국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학교들이 경험한 다양한 성공과 실패의 사례 속에서 살아있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학교와 지역사회 관계는 어떠했을까? 백승종교수(전 서강대)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이상촌 운동'을 중심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백 교수는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에서 시작된 이상촌 운동은 역사의 잦은 풍랑 속에서도 면면히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며 "이상촌 운동은 본래 안창호선생이 조직한 신민회 측의 구국운동(또는 실력양성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금연, 금주, 위생, 청결 운동이었지만 문맹퇴치와 소득증대 운동을 거쳐 마을 공동경작과 공동구매를 포함한 조합운동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강연에서 임희국교수(장신대 역사신학)는 '초기 기독교학교에서의 서구 선교사와 토착세력의 영향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임 교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대중에게 기독교는 신문명의 빛으로 다가왔기에, 새 시대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는 가운데서 몰락하는 민족을 구하고자 신식학교인 기독교학교로 왔다"고 해석했다.

임 교수는 또 "북간도의 명동학교는 설립자 유림 선비들이 신식교육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예배와 성경, 찬송 교육을 받아들였다"며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이 병행되고 차츰 신앙의식과 민족의식이 합일됐다. 그래서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학교와 나란히 토착인 교육자(많은 경우 유림 선비)가 세운 신식학교는 기독교학교이기도 했고 그냥 신식학교로 머물러 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학교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우리사회가 요구한 시대적 과업을 수행했다는 발제도 나왔다.

강영택교수(우석대 교육학)는 "일제 강점기 동안 기독교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데는 교회와 기독교학교에서 배운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며 대표적인 인물로 서재필, 윤치호, 이승훈, 안창호, 김구, 이승만, 조만식, 이상재, 전덕기 등을 꼽았다.

강 교수에 따르면, "배재, 경신, 대성, 오산 학교에서 가르친 신앙은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삶의 전부분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됐다"며 "신앙교육은 성경과목이나 예배시간을 외에 교과외 활동을 통해서도 일어났고, 신앙심이 투철한 교원들과 학생들의 만남을 통해 신앙이 학생들에게 전수됐다. 당연히 학생들이 배운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학교에서의 민족교육에 대해 강연한 한규원교수(전 우석대)는 "개화기 또는 일제 강점기에서 기독교학교의 교육은 어떠한 형태로든 시대적 상황에 충실하게 대처해 당시 나라가 직면한 자주독립이라고 하는 민족적 여망에 부응하는 교육활동을 전개했다"며 "당시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관공립학교를 우위에 두고 기독교학교를 비롯한 사립학교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를 기독교학교에 보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초기 기독교학교의 민족교육 상황을 짚어보며 오늘날 기독교학교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오늘날의 기독교학교의 상황을 교육의 공공성이란 문제와 관련해 되짚어본다면 나라와 민족이 기대하는 만큼의 교육에 충실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제기 했다.

한 교수는 "지금 기독교와 기독교학교가 할 일은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공공성을 회복하고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정신으로 가득 찬 인물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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