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17~22일

[가정예배]10월 17~2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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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3일(목) 11:40

월-포도원 품꾼의 비유
본문  마 20:1-16 
찬송가  214장(구 349장)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공평하지 않으시다. 예수님은 지혜롭지 못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 보낸다. 제 십일시는 오후 5시를 말한다. 이때 품꾼을 들여 보내 일을 시키고 저녁이 되었다. 품삯을 계산하여 지급한다. 품삯을 받은 사람들 중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을 시킨 시간과 품삯이 공평하지 못하다. 처음 사람만 품삯을 정했지 다른 사람은 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 마음대로 지급한다.
 
주님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품삯을 지급하면 요령이 생겨서 품꾼들은 늘 늦게 들어오려할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지혜롭지 못하시다. 만약 처음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었으면 모두 주인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줌으로 처음 받는 사람 빼고는 모두 불평한다. 그들은 무시를 당했다고 흥분한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기 시작한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렇게 기준과 원칙이 없이 일하시는 분일까? 그렇지 않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품꾼들은 건강하고 일 잘하고 늘 일찍 뽑혀 다니는 사람들이다. 매일 매일 일하고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일꾼을 뽑을 때 건강하고 체격도 좋고 일도 잘하는 사람들을 뽑는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몸도 약하고 일도 잘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무능해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 며칠간 일을 못했을 법하며 오늘 마저 일을 구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혹시 늦게라도 누군가 불러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놀지 않았다고 7절에 말한다. 일찍 나와 있어도 데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늦게나마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일하게 되었다. 주인이 얼마를 주건 불평을 말할 수도 없다.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주인은 그에게 일이 끝이 나자 누구보다 먼저 하루의 품삯을 주면서 빨리 가서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라고 빨리 보내주었다.
 
아무도 써주지 않는 그런 사람, 늙어서 써주지 않고, 병들어 써주지 않고, 무능해서 써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일한 양에 따라주시지 않고 하루 품삯을 계산해서 주는 주님의 마음을 알겠는가? 정말 공평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너무 모른다.
 
자신은 매일 매일 일하며 품삯을 받아 가정을 돌보면서 주님의 마음도 모르고 우리는 공평하지 않다고 따지는 악함을 주님은 꾸짖으신다.

오늘의 기도

늘 풍족한 삶을 살면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약한 자를 돌볼 줄도 모르며 공평한 처사만 고집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기준의 공평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공평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은철 목사
강내교회

화-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가정
본문  렘 35:12-17 
찬송가  90장(구 98장)


레갑족속은 한 사람이 아닌 한 집안 나아가서 한 문중, 즉 한 족속이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다윗왕 때에 레갑의 조상 요나답은 하나님께 수많은 세상의 유혹들과, 우상의 범죄를 멀리하여 자신들의 믿음의 성결을 지키고자 놀라운 서원을 한다. 선조 요나답이 하나님께 서원하며 후손들에게 명령한 것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평생 동안 장막에서 살 것을 명하였다. 그들은 한곳에 집을 지으면서 현실에 대한 안주와, 부를 축적하지 않음으로써 청빈한 삶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술을 금하므로 욕망에 대한 절개를 지킬 수 있었으며, 파종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인 하나님 바라기 신앙상태를 지켜낼 수 있었다. 선조 요나답 한사람에 의해 명령되어졌던 이 금욕적인 생활은 놀랍게도 오랜 세월 철저하게 지켜져 다윗을 거쳐 요시야 왕 때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하여서도 전해진다. 요나답의 후손들은 레갑인으로서의 명령을 순종하며 준행해왔음을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조상의 명령에 죽을 힘을 다해 유혹을 떨쳐가며 준행하는 레갑족속을 칭찬하시며 큰 축복을 하셨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분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오래 참으시며 백성들을 돌이키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렸을 때 레갑족속들은 하나님의 참 기쁨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은 어찌보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한 가문이 모두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명령한 선조의 말씀에 세상 모든 희락을 멀리한 채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절개를 지켜왔던 그들의 삶은, 한 사람이 시사해주는 영향력보다 더 큰 잠재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가.
 
우리는 성경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의 신앙은 우리의 존경을 받고 부러움을 자아내지만, 우리는 우리 앞의 욕심을 버리기 어려워 애써 성경 속으로 그 인물들을 밀어내고 만다. 끝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면과 타락 속에서 하나님은 참으로 외로우셨을 것 같다. 그 힘든 짝사랑을 통해 상심해계셨을 하나님 앞에 레갑족속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 같은 존재였을까. 늘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하는 우리지만 늘 우리 욕심 때문에 그 고백은 허공을 치고 다닌다. 레갑사람들은 진정 주님께 귀 기울일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신앙의 결단을 보인 사람들이고 실천하였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묵묵히 레갑인들 처럼 말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과 함께 하심과 동행을 수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늘 그 말씀과 부르심에 순종하고 준행하는 우리 가족이 되게 하시고, 그 순종함이 주님을 기쁘시게하고, 아비야처럼 주님을 위로하며 주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진동 목사
양포교회


수-범사에 감사하는 신앙
본문  엡 5:20 
찬송가  393장(구 447장)

독사도 연못의 물을 마셨고, 젖소도 그 물을 마셨다. 그런데 독사는 그 물을 마신 후에 '독'을 만들였고, 젖소는 우유를 만들었다. 똑같은 물을 마셨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자신의 속이 문제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환경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가 문제고, 내 영혼 내 신앙이 문제이다. 행복해지길 원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여러분이 항상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 기록되어 있다.
 
"범사에, 모든 일에 매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한 마디로,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는 말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첫째, 일상 생활속에서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소설가 조창인의 '가시고기'에 나오는 말이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
 
둘째, 물론 형통할 때는 더 감사해야 한다. 형통할 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쉽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말씀을 떠올려보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형통할 때 더욱 더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한다.
 
셋째, 더 나아가서,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란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쳐오고 역경 속에 있어도, 잘 생각하고 따져보면 얼마든지 감사의 내용이 있다. 정말 성숙한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앞에 감사할 줄 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감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래서 반드시 함께 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지속되고, 고난 중에 감사하면 고난이 중지된다."
 
요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이런 형편 가운데 감사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적의 문을 열어주실 줄 믿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가? 무엇보다 영원히 죽을 인생을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구속해 주시고 천국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우리 성도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고 죽어도 천국인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승리와 축복의 보장이 있다. 감사의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의 삶, 기적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해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감사신앙을 회복하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만 목사
이문동교회


목-하나님의 최고 걸작품
본문  엡 5:1-7   
찬송가  333장(구 381장)

교회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필요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일까?
 
첫째, 사랑으로 행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이 구절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 나오는 용서와 관련된 말씀이다. 사람은 용서할 때 가장 하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용서는 어디에서 나올까? 사랑에서 나온다. 용서와 사랑은 한 짝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한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삶이란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삶을 뜻한다. 이 세상에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다.
 
둘째, 음행을 피하는 삶이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모두 성적인 범죄와 관련된 행위이다. 더러운 음행은 생각도 하지 말고, 잘못된 성적인 얘기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벗어난 과도한 성적 욕망은 항상 비참한 결과를 야기한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허무함과 고통스런 후유증이 뒤따른다. 요새 성적인 해방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성적인 이탈이 심하다. 그것이 바로 말세의 징조이다. 말세에 찾아오는 가장 큰 2가지 병은 정신병과 성병이다. 쾌락과 음행을 주의해야 한다.
셋째, 말을 지혜롭게 하는 삶이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여기서 '누추함'이란 '추한 말'(상스러운 말, 도가 지나친 말)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을 금하고 오직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하라고 권면한다.
 
넷째, 우상숭배를 멀리하는 삶이다. 5절에서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에 대한 경고를 한 번 더 하고 있다. 특별히 탐하는 자와 우상숭배 하는 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질까? 탐욕을 부추기는 헛된 말에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돌멩이에, 부적에 절을 한다.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창조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모르고 자기보다 못한 것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배반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된다.

왜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못할까? 가장 큰 이유는 사단의 거짓말에 속고, 자신의 느낌에 속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금방 "나는 추한 죄인이다! 나는 틀렸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을 용납하면 어느새 사단이 찾아와 '신분이나 관계'가 아니라 '행위나 공로'로 우리를 판단하며 우리를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걸작품이다!"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영기 목사
이경주안교회


금-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본문  행 1:12-14 
찬송가  433장(구 490장)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란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 뜨거운 가을 햇볕 앞에서 알찬 결실을 재촉하는 오곡백과처럼 우리도 그동안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기뻐하시는 소담스런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는 가을이기를 바란다.
 
성경에 보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락방에 올라갔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 모인 무리들의 명단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사도와 여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15절에는 이렇게 모인 수가 1백20명이나 되었다고 밝혀준다. 참으로 이처럼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더 아름다운 일이다. 한 사람의 기도 보다는 두 사람의 기도가 더 힘있고 능력있게 역사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잊지말자.
 
여기 모인 1백20명이 무슨 일을 하였을까? 14절 하반절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전혀 힘쓰니라"라고 말한다. 이들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여기에 마음을 같이하여 라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기도했다'는 말이다. 저들의 기도는 몸만 같이하고 마음은 각자 자기의 소원을 위하여 소리를 지르며 기도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마음을 같이해서 한 목적을 위하여 뜻과 마음과 목소리를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의 열기로 달구어진 용광로였다. 그러면 이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그렇게 기도한 제목이 무엇이었는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했는가? 아니다. 저들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힘입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면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는 주님의 분부대로, 성령의 능력 힘입기를 위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의 큰 역사의 주인공들이 된것이다. 
 
저들은 또한 이렇듯 모여서 한 마음으로만 기도한 것은 아니다. 저들은 힘써 기도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꾸준히 계속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주석학자는 '그들은 기도에 응답될 때까지 기도에 집착했었다'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시니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다"고 했다. 참으로 이 같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는 산도 옮긴다. 우리도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다. 이 가을에 이같은 기도의 열심이 회복되어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활력이 넘쳐나고 삶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면서 우리도 맑고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이 가을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교회와 가정이 성령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남석 교목
전주기전여고

토-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자
본문  약 2:1-12 
찬송가  338장(구 364장)

이 없는 믿음이 잘난 체하며 거만하게 만들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비난하는 혀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크다. 성도에게는 남에게 명령하고 비난하여 해를 끼치는 행동에 대한 경계와 아름답고 바른 언어 사용이 요청된다.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항상 지휘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즐겨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판단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도록 명령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셨으며, 그들이 받은바 지혜에 따라 합당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선생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이유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우리가 남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는 심한 충동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남을 향한 죄를 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다른 사람의 약함과 허약성에 대하여 헛되이 떠드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내적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할 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자비롭게 하는 태도를 행하여야 한다.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도 다스릴 수 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짐승과 같은 맹렬함과 교만의 마음이 다분히 많이 숨어 있다. 이것이 대부분 말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마음에 각오와 경계심으로 혀를 제어하여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면 복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혀의 바른 사용에 대하여 부모에게 배운다. 가정은 자녀가 처음 언어를 배우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름다운 언어습관을 배운 아이는 언제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람들과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 있다.
 
인간의 혀는 동물들을 길들이는 기술과 능력으로는 결코 길들일 수가 없다. 혀로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와 도움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과 예배에서 우리의 혀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한 혀가 자기의 동료 인간들을 욕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은 남을 욕되게 하는 비난을 감히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배하려는 사람, 잔소리 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아니라 서로 섬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다. 성숙한 언어생활을 습관화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경건한 말을 통하여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이 위로받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만기 목사
늘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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