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10월 3~8일

[가정예배] 10월 3~8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9월 29일(목) 11:44

월-주님을 바로 아는 사람
본문  수 14:6-12 
찬송가  347장(구 382장)

출애굽의 리더였던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나안땅 입성을 앞두고 죽게 되자, 늘 그의 곁을 지키며 기도하던 행동의 사람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이스라엘의 리더로서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행동의 사람 여호수아에게는, 둘도 없는 믿음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갈렙이다. 갈렙은 출애굽 직후 가데스 바네아 광야에서 각 지파에서 차출된 12명의 지도자급 정탐꾼들 중 한 사람이었다. 출애굽 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땅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두 사람, 즉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 했을 때, 그의 그늘이 되어야만 했던 갈렙의 마음은 희비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고 한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우리 신앙인들이 배워야할 최고의 관계로서 새로운 롤 모델이 되었다. 갈렙은 사심 없이 친구이자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모세가 명령할 때에 내가 순종했던 것처럼 당신의 명령에도 나는 순종합니다."
 
갈렙의 그 믿음의 고백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가나안 입성 후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을 아쉬움을 두고 각 지파에게 땅을 배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모두 모여 땅을 제비뽑기 하기 전이다. 모두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바라보고 있을 그때였다. 믿음의 사람 갈렙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앞에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이 밟은 땅을 갈렙이 원할 때에 모세가 자기에게 주겠노라는 약속이다. 요단 동편에 이미 자리 잡은 르우벤지파와 갓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를 뺀 9지파는 자신들의 분깃으로 서로 좋은 것과 큰 땅을 가지기를 원하며 예민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부담감과 긴장감으로 인해 마음이 몹시 무거웠을 듯 하다. 이 극적인 상황에서 갈렙은 오히려 자신만이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기득권을 포기한 채, 욕심을 다 버리고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무서운 아낙자손이 살고 있던 척박한 땅 헤브론을 요구한다. 여호수아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는다. 갈렙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분깃을 나누는 작업은 은혜와 감동으로 이루어져, 아무런 부작용 없이 순종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갈렙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 혹은 권력까지도 버릴 수 있었던, 오직 하나님만을 좇은 사람이었다. 갈렙이 정복했던 헤브론은 이스라엘에 있어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영적인 축복의 땅이 되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시대를 바꿔놓을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진정 주님을 아는 자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 앎을 행함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진동 목사
양포교회


화-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본문  창 13:10-13 
찬송가  312장(구 341장)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내가 선택한 대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공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기로에서 이렇게 해야 할지 망설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다시 말해서 눈 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결정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맘아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롯이다. 롯은 자신만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대로 육신을 따라 결정한 사람이었다. 롯이 선택한 땅은 토양도 비옥하고 수자원도 넉넉하고 애굽 땅처럼 풍요롭고 좋은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문화를 받아들인 땅이었다.
 
결국 롯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재물도 다 잃어 버렸고 그의 아내 마져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육신의 눈을 기준으로 삼은 롯은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망하고 쫓겨났다. 믿음이 없는 선택,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선택, 자신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선택의 결과는 이렇게 불행할 수 밖에 없다.
 
한편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선택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선택한 결과 아브라함은 놀라운 축복을 선물로 받고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되었다.
 
두 선 사이의 1도 차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 길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두 선 사이는 점차 벌어지고 나중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된다. 롯과 아브라함도 역시, 선택의 순간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흘러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바라기는 눈앞에 이익보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무엇보다 믿음의 선택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롯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꿈을 따라 말씀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고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만 목사
이문동교회


수-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삶
본문  마 26:36-46  
찬송가  361장(구 480장)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급박한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이 함께 하기를 그렇게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점검해 보자.
 
주님은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지금 심정은 심히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이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한다. 그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였다. 자신의 목숨이 지금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바쳐지기 때문에 이것을 피해보려는 심각한 기도였다. 자신은 살고 싶고,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다.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누가복음에서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너무 힘이 들어 천사들이 와서 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고 순종하는 기도로 끝이 난다.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는 제자들을 본다. 아마 지금도 주님은 하늘에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하실 것이다. 우리의 심정은 어떤가? 제자들처럼 잠만 자는 자들은 아닌가?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기도하지 않음으로 모두 시험에 들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사탄은 우리를 노리고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게 하고, 예배에 자주 빠지게 한다. 그리고 큰 어려움이 닥쳐서야 후회하게 된다.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핑계댈 것인가?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하면 천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가 일어나 기도할 때에 새로운 힘이 날 것이다.
 
주님은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신다. 이제 기도의 시간은 끝이 났다. 항상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팔리고 주님을 잡으러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다가온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고 대치할 능력이 없는 시간이 바로 다다른다.
 
기도하지 않는 자들에게 갑자기 닥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다. 일어나 함께 가야 한다. 기도 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닥친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는다. 준비된 자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대처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배신하고 도망가고 숨는 추태를 부린다. 오로지 자신만 살겠다고 몸부림치게 된다.

오늘의 기도

주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늘 핑계만 댑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자 하시는데 잠만 자는 우리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은철 목사
강내교회

목-나를 도우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
본문  시 121:1-8  
찬송가  433장(구 490장)

자신의 삶이 경건한 믿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를 부름으로 마음을 다듬으며 올라갔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간 것은 잡답이나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성전에 올라간 것이다.
 
시편 121편도 그 중의 하나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근처의 장엄한 성산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격, 곧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찬양이다. 
 
첫째,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만나는 어려움과 고통에서의 유일한 도움은 하나님이심을 찬양한다. 예루살렘 주변의 산도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산이라고 믿고 그 산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라고 자문자답한다. 순례자들의 순례길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은 오직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도움을 찾지만 성도들의 인생의 모든 여정을 지켜주시는 이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그 삶의 간증으로 노래한다. 
 
둘째, 인생의 여정을 온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간증하며 노래한다. 인생의 유일한 참 도움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고백한 그는 이제 그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위험도 미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완벽하게 보호해주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어떻게 보호해 주시는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신다.
 
셋째, 성도를 어떤 환난에서도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한다. 그러기에 주 안에 있는 자는 안전하다고 선포하고, 오늘 우리도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강하게 지켜주심을 우편의 그늘로, 더 나아가 해와 달뿐 아니라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고 영혼까지도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주심을 노래한다. 여기서 출입은 단순히 나가고 들어오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사업이나 교제 등과 같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매사에 깊이 관여하시고 참여하신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세신바 되었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깊은 관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늘 동행하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인간의 방법을 힘써 찾으며 살아온 죄를 사해 주옵소서! 나의 도움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영원토록 출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간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남석 교목
전주기전여고


금-가정은 축복의 통로
본문  시 92:12-15  
찬송가  412장(구 469장)

오늘 말씀은 '안식일의 찬송 시'라는 표제의 말씀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행사를 찬양하는 내용이자 의인들이 누리게 되는 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의 언약을 믿음으로 복이 넘치는 통로가 되라 하신다.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넘치기 위해선 우리들이 선 자리가 중요하다. 우리들이 선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반석 위여야 한다.
 
첫째, 가정은 하나님의 궁정 위에 세워졌다. 종려나무와 백향목은 매우 황폐한 땅에서 자란다. 종려나무는 메마른 사막이나 열대지방에서, 백향목은 춥고 메마르고 바위투성이인 고원지대에서 자란다. 그러나 이들은 놀랍게 번성하고 발육한다. 이 나무들은 사막 가운데 깊이 숨겨져 있는 거대한 샘의 물을 빨아들인다.
 
우리의 여건이나 환경이 결코 최적의 환경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깊은 샘에서 은총과 사랑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알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궁정에 심기웠다고 하신다. 교회의 주인이시고, 머리 되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이라고 하신다.
 
이 하나님의 선언과 약속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기초와 발달과 성장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성장한다. 인간의 노력이나, 금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움직이는 성도가 바른 성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 되게, 하나님의 성도답게 살라고 하신다.
 
둘째,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얻은 감격과 기쁨으로 예배드리기 위하여 이 땅에 존재하라 하신다.
 
예배를 잘 드림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믿음과 함께 인간들 간의 관계를 상징을 한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이웃과 단순한 필요만을 채우는 나눔이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복음을 나누어주는 단계까지의 교제를 말한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온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배자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종려나무는 사막의 한 가운데서 있으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은 과일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나무의 그늘에서 많은 초목들이 살아간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세상의 삶에 지친 이웃들의 쉼터가 되어야 한다. 예배가 역동적이고, 성도들이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며, 헌신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이웃의 아픔, 성도의 아픔, 나라의 죄를 나의 죄로 알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가정에서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성령의 열매들을 맺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궁정에 세워짐을 깨닫게 하심을 찬양합니다.이 땅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하고 거듭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만기 목사
늘푸른교회


토-유대인의 종교행위, 나의 종교 행위
본문  요 7:19-24   
찬송가  265장(구 199장)

신앙에는 종교 행위가 따르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예배일 것이고, 기도, 헌금 등 일 것이다. 이런 것이 종교 행위이다. 사실 매일의 생활이 중요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이라고 더 많이 일컫는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신앙생활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충돌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실천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신다. 다시 말하면 종교행위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나도 기분이 나빠서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고, 말씀 한마디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셨다. 지금 유대인들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하나였다. 그것은 넓게는 율법 전체요, 좁게는 안식일 문제였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종교행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신앙생활이 엉터리가 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즉 종교 행위는 의를 쌓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세심하게 지킴으로 그만큼 더 공을 쌓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종교 행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문제되는 것은 마음이다. 종교 행위는 그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표현에 불과했다.
 
왜 주일을 지키는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기도하는가? 나의 모든 능력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 찬송하는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기 때문이다. 왜 헌금을 하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종교 행위는 내 중심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능력을 가지거나 공을 쌓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중심에는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배드리는 자체를 자기 공으로 생각한다.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어떤 행동들을 하고는 서로 칭찬하고 박수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으려고만 했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비취도록 마음을 열었던 적이 없었다.
 
오늘날도 성도들은 신앙적인 논쟁을 싫어한다. 먹고 살기 바쁜데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한다. 이런 현상을 세속화 현상이라고 한다. 지극히 피상적인 종교 행위로 스스로 만족한다. 사람의 겉만 보고 좀 좋으면 칭찬하고 아부하는 것이 이스라엘 교회 전체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이와 같지는 않은가?

오늘의 기도

주님! 진리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계셔서 늘 겸손하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가 넘쳐서 이 땅의 것들로 마음 빼앗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영기 목사
이경주안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