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이력서

다시 쓰는 이력서

[ 제96회 총회 아침예배설교 ] 제96회 총회 넷째날 아침예배 설교, 영도중앙교회 김운성목사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1년 09월 26일(월) 11:51

'다시 쓰는 이력서' (딤전 1:12-17)
영도중앙교회 김운성목사

 
몇 해 전 제게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김 목사님, 저는 아무개 목사인데, 지금 모 교회 임시당회장입니다. 목사님께서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지원하셨는데, 마지막 세 사람 중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당회장인 제가 목사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놀랐습니다. 전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지원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여기 이력서며, 자기 소개서 등 모든 서류가 다 있는데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전 지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류를 빼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몇일 후 의문이 풀렸습니다. 저를 잘 아는 어느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 혼자 생각으로 제가 그 교회에 가면 좋겠다고 여겨 자신이 직접 제 서류를 만들어 보냈다는 것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 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사진까지 구해서 제 소개서와 이력서까지 작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래, 도대체 이력서와 소개서에 뭐라고 쓰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말씀하시길 "목사님이 직접 써도 그렇게 못쓸 정도로 최고로 잘 썼지요. 다 잘 하는 목사라고 썼지요"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웃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 같은 자기 PR시대에는 효과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멋지게, 유능하고 훌륭하게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이력서는 화려하게 마련이고, 자기소개서는 "나는 이것도 잘 할 수 있고, 저것도 잘 할 수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로 가득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바울 사도께서 쓰신 자기소개서를 군데군데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3장 5-6절을 보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는데, 바울 사도의 이력서라고 하겠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1장 22절 이하에서는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바울 사도는 이러한 자기소개서를 쓴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1절에서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공연히 쓸데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후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이력서, 자기소개서가 거짓이거나 과장되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바울 사도의 이력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과장된 것도 아니고, 위조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랍비 중 한 사람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그의 이력서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그는 정말 대단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또 셋째 하늘에 올라가는 신비로운 영적 체험도 했습니다. 바울은 출생, 학벌, 능력, 충성도, 영적 체험 등 모든 면에서 최고였습니다. 만약 바울 사도가 어느 교회 목회자로 지원한다면, 그보다 더 자격조건이 뛰어난 후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후회하였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훌륭함, 뛰어남을 드러내는 자기소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력서를 다시 쓰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를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썼던 내 이력서는 취소하겠습니다. 제발 그 이력서를 쓰레기통에 버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새 이력서를 보낼 테니, 그것으로 해 주십시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력서를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자신의 훌륭하고 뛰어난 모습을 적극적으로 나타낸 이력서를 폐기하려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저는 모세에 대해 궁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는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말재주가 무딘 분이었을까"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 집사님께서 순교하기 전에 하신 마지막 설교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궐에서 최고의 지도자 교육을 받았고, 말과 하는 일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가 애굽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상에 입각한 내용이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수많은 군사들을 인솔하고, 많은 백성 앞에 돋보이는 인재였을 것입니다. 그는 대중 연설에도 능한 멋진 리더였을 것입니다. 말 잘하는 모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출애굽기 4장 10절을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분명히 스데반 집사님께서는 모세가 말과 하는 일에 뛰어난 인재라고 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말할 줄 모른다, 입이 뻣뻣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어떤 말이 맞는 것일까요? 모세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요? 
 
저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말씀은 스데반 집사님께서 모세를 제3자의 입장에서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은 정말 말을 잘합니다. 그 분은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 분은 리더십이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에게 맡겨 보십시오. 그 분을 모셔 오십시오. 그 분이 맡으면 잘 해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4장의 말씀은 모세 자신의 고백입니다. "남들은 저를 두고 제가 제법 뛰어난 인재라고 말합니다만, 그 말들을 잘못되었습니다. 그 분이 저를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말재주가 없습니다. 저는 무능합니다. 저는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모세 자신도 한 때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맨 발로 엎드려서 "말할 줄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던 때로부터 40년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력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궁궐에서 호화호식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철저한 애굽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몸속에 히브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애굽 사람과 싸우는 한 히브리인을 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애굽 궁궐에서 배운 무술이 유용했던 것 같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히브리인을 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 제출한 이력서였습니다. "하나님, 잘 보셨습니까? 저를 애굽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 데 꼭 써 주십시오. 전 무술도 잘 합니다. 전 리더십도 있습니다. 전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전 말도 잘합니다.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 저 정도로 갖춘 사람이 있다면 나오라고 하십시오. 제가 적임자입니다. 더구나 제 가슴엔 열정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써 주십시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사십 년이 지났을 때, 미디안 광야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굴이 그을고, 모래 바람속에서 그의 얼굴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을 때, 그는 '다시 쓴 이력서'를 하나님께 제출하였습니다. 다시 쓴 이력서는 간단했습니다. 처음 썼던 이력서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앞뒤를 빽빽이 채우고 있었지만, 다시 쓴 이력서는 간단했습니다. '이름 - 모세. 나이 - 팔십 세. 할 줄 아는 것 - 없음. 언변 없음. 능력 없음.  열정 - 다 식었음.' 이것이 모세가 다시 쓴 이력서였습니다.
 
저는 모세의 두 가지 이력서 중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이력서를 더 신뢰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다시 쓴 이력서였습니다. "네 이력서가 맘에 든다. 널 내 사람으로 쓰겠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너를 세우겠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

그가 사십 년 전 처음 썼던 이력서는 쓰레기통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력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처음 이력서를 제출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백성을 구원하기는커녕 자신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기는커녕 찾는 사람 없는 광야에서 지평선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사람들의 지도자가 되는 대신에 양떼를 몰아야 했습니다. 위대하게 되고자 했으나, 아주 작은 사막의 목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새로운 이력서를 하나님 앞에 제출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귀하게 세우시고, 그를 능력있게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어 쓰임받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력서를 다시 쓰십시오.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다시 쓴 이력서입니다. 그는 다시 쓴 이력서를 인생과 신앙의 후배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먼저 보이고 있습니다. 12절부터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나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살게 된 것, 지금까지 이것저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난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난 자격이 없었습니다. 난 오히려 쫓겨나야 마땅한 죄인 중의 우두머리입니다. 난 이력서를 낼 자격조차 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이 나라의 선구자요, 견인차요, 존경받는 인도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찬사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 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위대하게 되고 싶지만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데, 우리는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핀잔을 줍니다. 지금 우리 처지는 미디안 광야의 모세와 같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언제부터인지 "난 잘 할 수 있다. 나야말로 적임자다. 나 정도의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학벌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내가 최고다"란 식의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교회들도 이런 이력서를 내는 목회자를 환영합니다. "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난 멋진 목회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 몇 년 안에 교회를 두 배 이상 부흥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난 교육전문가이며, 제자훈련 전문가이며, 난 가정목회 전문가이며, 청소년 전문가입니다. 난, 난....모든 것을 다 잘 합니다." 이런 이력서에 홀딱 반합니다. 이런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는 노회나 총회에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력서는 하나님께서 쓰레기통에 폐기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젠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합니다. "하나님, 전 자신 없습니다. 전 이 교회를 맡을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저는 너무 무능합니다. 전 설교도 잘 못합니다. 설교한 대로 사는 것은 더더욱 못합니다. 전 남을 잘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전 가난하고 병든 교우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주는 일도 잘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설명할만한 언변이 없습니다. 전 늘 부끄럽기만 합니다." 목사님들도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합니다.

장로님들도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전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성도들의 인도자가 되겠습니까? 저보다 더 순결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저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 정말 무능합니다."
 
물론 우리가 스데반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스데반이 제3자의 입장에서 모세를 칭찬한 것처럼, "저 목사님은, 저 장로님은 다 잘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저 분은 총회를 섬길만한 충분한 능력과 영적 자질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는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화자찬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요, 그런 이력서는 하나님께서 쓰레기통에 버리실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이력서를 다시 쓸 때, 비로소 존귀해질 것입니다. 우리 교단이 장자교단이라고 자랑하는 첫 이력서를 폐기하고, 겸손히 이력서를 다시 쓸 때, 정말 한국교회와 민족과 세계 앞에 존귀한 교단으로 쓰일 줄 믿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종이를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고, 손에 펜을 쥐어 주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력서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총대부터 먼저 이력서를 다시 쓰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총회는 정말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쓴 이력서를 하나님 존전에 드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