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만 몰입해야"

"하나님께만 몰입해야"

[ 제96회 총회 아침예배설교 ] 제96회 총회 셋째날 아침예배 설교, 시온성교회 유종만목사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1년 09월 26일(월) 11:42

'몰 입' (빌 1:8~11)
시온성교회 유종만목사


유치원 다니는 손녀가 하루는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왜?" "할아버지는요 다 커서 뭐가 될 거에요?", "나? 다 커서 다시 목사 할란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30여 년 전 노회장께서 목사 된 것을 선포함으로 명분상 목사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목사가 되어져 가야하고 그때 하나님께서 목사노릇 잘 했다고 해야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4, 15)

아직도 어린아이 같이 머물러 있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고 있어야 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목사로서 연륜이 더해질수록 내가 얼마나 모자라는 것이 많은지 아직도 다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지를 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저는 목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계획도 목표도 해답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목회에는 교회운영이나 건축이나 선교, 교육, 구제 모든 일에 돈이 필요하지만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돈이 돈으로써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써, 고백으로써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는 신비한 곳입니다. 거룩의 신비함, 은혜의 신비함, 구원의 신비함, 축복의 신비함, 말씀의 신비함, 섬김의 신비함, 하나 됨의 신비함이 있으므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될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가장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시켜야할 훈련을 못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 지붕에 비가 새도 괜찮고 너무 더워서 예배드리고 나면 땀으로 젖어 있어도 괜찮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면서 모이는 자세, 죄가 무엇이며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얼마나 서로 용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가를 인정하면서 아끼고 서로 돌보아주고 잘난 마음, 똑똑한 주장은 다 땅에 묻어버리고 무릎 꿇는 것 ,이것을 못했습니다. 너무 잘나고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유명한 것을 좋아하는 성도로 키웠습니다.

제가 부목사 때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무게가 있고 엄위하시고 부모님 같으신 분이고, 나 부목사는 한 반을 맡은 선생처럼 생각이 되어졌어요. 그래서 어쩌다가 한 번 설교할 기회가 주어지면 아주 신났어요. 담임 목사님이 하시기 거북한 말, 교훈적인 것을 들고 교인들을 아주 회초리질을 해댔습니다. 그러다가 더 열정적으로 할 때는 몽둥이도 들고 칼도 들어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은혜 못 받았는데 혼자서 만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담임 목사가 되고 나니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야 야단맞고 벌 받고 해서 울면서라도 엄마 아빠한테 달려와 안길 수가 있지만 엄마 아빠한테 야단을 맞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가출하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회초리가 잘하는 것이 아니고 야단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입니다.

목사도 목회하면서 교회가 훈련의 장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훈련의 핵심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히 하나님만,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집중하고 몰입애햐 된다는 것입니다. 몰입이라고 하는 것은 시선, 느낌이라고 하는 감정과 의지가 다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과녁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사격선수, 양궁선수, 그 순간에는 모든 생각과 시선이 그 과녁을 목표로 집중합니다. 그 순간에는 숨도 멈추고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목표점에 몰입합니다. 응원소리도 꽹과리 소리도 관중들의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시선은 그 과녁을 향하고 있는데 생각이 딴 곳에 있으면 몰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집중이 되지 않고 손이 떨리게 되고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과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목표점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운동하고 체력단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상, 정신 집중, 시선과 손발과 마음에 자기 암시를 가지고 몰입하는 정신훈련을 합니다.

운동만 그렇겠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혹은 신앙생활이나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옳게 여기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하나가 되어져서 거기에 몰입이 될 때, 그리고 여기에 내 삶의 방향과 목적이 합쳐질 때 거기에서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게 됩니다. 의미가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늘 생각하기를 목회를 좀 기쁘게 하자! 신이 나서 못 견디게 하자! 웃으면서 하자는 생각을 갖습니다. "중간에 멈추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의미 있게 하자." 3절 하반절에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절에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세상 환경, 내 형편과 처지, 불확실함, 연약함 속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987년 일본에서 '소바 한 그릇'이란 소설이 발표되었습니다. 소바는 일본식 우동이니 우리말로는 '우동 한 그릇'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삿보로에 있는 북해정이란 소바집에 12월 31일, 일본은 양력만 있으니까 그해 마지막 날 늦은 저녁시간에 초라한 젊은 부인이 두 아들을 대리고 북해정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말하기를 "지금 문 닫을 시간인데도 우리의 주문을 받겠느냐?" 또 "셋이 왔지만 도시코시 한 그릇만 시켜도 되느냐?"고 합니다. '도시코시'는 해넘기기 국수인데 우리로 말하자면 떡국과 같은 의미입니다. 도시코시 한 그릇이 150엔 우리 돈으로 2천원 정도인데 주인입장에서 지금 문을 닫아야 되고 또 단체로 와서 매상이라도 올리면 모를까 150엔 때문에 가게 문도 못 닫고 종업원들 퇴근도 못하니 거절할 수도 있는데, 주인은 정중하고 친절하게 손님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우동 한 그릇을 놓고 어린 두 아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가에는 굵은 눈물이 가득베어 있습니다. 마지막 국물까지 다 마시는 것을 보면서 긴 한숨을 짓습니다. 그리고 1년뒤 섣달 그믐날 그 모자 셋이 또 북해정에 와서 지금 문 닫을 시간인데 주문을 받겠느냐? 또 셋이 왔지만 한 그릇만 주문해도 되느냐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방에서 주인과 종업원이 모여 이야기 합니다. 그 어머니를 보아하니 공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지금 퇴근한 것 같고 생활이 너무 어려워 150엔 하는 도시코시를 한 그릇밖에는 못시키니 그냥 한 그릇 값만 받고 세 그릇을 주자고 합니다. 그 때 주인이 "안 된다. 오늘 세 그릇을 내 주면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을 것이니 그 대신 국물도 많이 붓고, 국수 양도 좀 더 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몇 년 같이 반복되었다가 어느 해부터 세모자는 오지 않았고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모자가 다시 찾아 왔습니다. 두 아들은 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모자가 늘 와서 앉았던 그 자리에 언젠가는 그 세모자가 다시 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텅 빈 가게 이지만 그 식탁에 예약석이라고 써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그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앉아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일찍 죽고 남긴 빚을 갚기 위해서 밤낮 일했고 이제는 그 빚을 다 갚았고 두 아들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큰 도회지 병원에서 일할 수 있지만 고향 삿보로에 와서 의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젠 기나긴 고생이 다 끝났습니다. 오늘은 우동 세 그릇을 주문합니다."
 
이 글이 FM 도쿄 송년프로그램에서 낭독이 되었고 산케이 신문사회면 톱으로 다뤄지면서 편집부도 울었고 전 일본이 울음바다 속으로 침몰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지하철에서는 읽지 마십시오. 지하철이 눈물에 잠깁니다"라고 할 정도로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동 한 그릇에 나타난 주인의 장사정신, 자식에 대한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소설이냐? 사실이냐? 사실이다.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냐? 주인공 찾기에 나섰지만 결국 1년 만에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허구조차 역사적 사실로 바꾸고, 역사적인 사실도 필요에 따라서는 허구로 만드는 '대세사관'이, 이 소설에도 깔려있습니다.

독도를 자기네 땅 죽도라고 우기는 것이나, 일제 때 수탈을 수용이라고 하는 것이나, 신사참배 강요를 신사참배 장려라고 했고 강제징용을 동원이라고 했고 정신대 강제 징집을 정신대 자원참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탈바꿈 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의 쓴 맛을 봤고 이번에 지진과 원전사고로 두 번 핵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 기구한 삶에서 소바 한 그릇에 눈물 흘리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 우리의 선진들은 어떠했습니까?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지금의 중국 대련)에 갇혀있을 때 그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며 입을 굳게 다문 체 솜바지 저고리를 짓고 또 편지를 썼습니다. 감옥에 이 물품이 전달되었을 때 일본 검사가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아! 조선에 이렇게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단 말인가?",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죽으라.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끝까지 신념을 지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동 한 그릇을 놓고 눈물 흘리는 일본의 어머니와 나라와 민족의 운명 앞에 아들을 바치고도 굳게 입을 다물고 눈물을 삼켰던 우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1932년 상해 임시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봉길의사가 마지막으로 두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두 병정아, 너희는 애비 없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조선이 독립되는 그 날 태극기 휘날리며 나의 무덤을 찾아다오." 그 때, 윤봉길 의사의 나이 24살, 24살의 아버지가 쓴 편지가 지금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는 오로지 신앙의 지조와 조국통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여서 일신의 안이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 변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던 파란 눈의 젊은 토마스 목사, 그 피가 한국교회에 쏟아 부어 졌습니다.

창세기 42장에 요셉, 아버지의 사랑과 안락한 생활은 잠간이었고 고난의 연속이었고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지고 있었고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 대신 오로지 하나님께만 몰입합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20년이 지나서 만난 형들과는 그 환경과 신분이 천지차이였습니다. 요셉은 신앙과 인격과 지도력이 탁월한 대 애굽 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지성도 감성도 영성도 풍부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 그 지혜와 그 권이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고 모든 풍요를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늙었고, 여전히 초라한 양치기요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서 양식을 사러 온 궁색한 사람들이 되어있었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차이 나게 했습니까?

요셉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 할 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만 구했습니다. 하나님만 꿈이고 능력이었습니다. 고난의 눈물 속에서 꿈을 가집니다. 변화를 주고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종살이에서도 감옥살이에서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자기중심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해결자 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형들은 고생도 없이 좋은 집에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지냈지만 하나님을 향한 몰입이 없었습니다. 사모함도 없고, 하나님의 섭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해결책이요 하나님이 도우심이며 하나님만이 꿈이었으니 무엇이 감사한지, 무엇이 기쁜지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편안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새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집에서 지냈지만 영혼을 새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꿈을 갖게 하고, 믿음이 인내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역사의 시작도, 교회의 시작도, 내가 태어나 사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내가 계획했다고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직분 받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자도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의 종지부는 하나님이 찍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모든 일을 연결 지어야 합니다. 고향 같다고 향우회 만들고, 사람이 자기 태어날 지역을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학교 같다고 동문회 만들고, 성씨 같다고 종친회 만들고, 무슨 연결고리가 그렇게 많은 지요. 어느 지방에는 체중 130Kg이상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황소회도 만들었어요. 이 고리가 튼튼합니까? 내가 손해 보아도 안 끊어집니까? 조금만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싸움 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고리를 연결하고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건강이 있고 일할 것이 있고 기회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작년에 세상 떠난 사람이 얼마나 살고 싶어 했고 일하고 싶어 했던 2011년입니다. 이제 세상 떠난 사람입장에서 오늘을 얼마나 살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시간 걸리는 일에 대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관심도 없고 훈련 받고 싶어하지도 않고, 어디에 좋은 자리 있나에 관심을 쏟습니다. 어디가 보니까 누가 나팔 불고 그러던데-누구 그러는 꼴 보기 싫어 이 싸움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다 틀린 것 같고 내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이런 철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손주들한테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왜요?, 어떻게요?" 그러나 저의 대답은 "다 크면 알게 돼."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같다는 것이 기분 좋게 하는 말이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은 나에게도"라고 하는 고백이 정확하게 맞다고 한다면 불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 문제를 중생한다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경험이나 위치에서 대단한데, 교회에서는 어린 아이도 있으니 다툼과 분냄과 미움와 분열이 계속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드소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 몰입해야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 열매가 영광이요. 기쁨이요. 이 열매에 생명의 씨가 있어서 생산성을 갖습니다. 부흥이 있습니다.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고 대학생인데 구구단 외우고 있다면 정상입니까? 맺을 때에 맺어야 하고 많이 심어 많이 거두어야 합니다. 많이 거두되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어야 합니다. 주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이 하나님께만 몰입하면 거룩하신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될 줄 믿습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