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 말씀&MOVIE ] 감독: 장훈, 2011,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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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8월 18일(목) 10:06

전쟁영화 장르에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되는 '고지전'은 화두로 다음의 질문을 제시한다. "전쟁을 왜 하는지 아느냐?" 처음에는 북한군 장교의 입에서 나왔지만, 후에는 당시 포로로 잡혀 있었던 국군의 질문이 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임에도 애록고지를 두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현장에서 곱씹어진다. 영화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성찰로 전개된다.

전쟁에는 승자가 있기 때문에 승자가 규정하는 의미가 있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 입장에서, 특히 장교 입장에서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전쟁의 의미가 분명했고, 또 그것을 아는 자가 승리자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 역시 지리한 사건들의 반복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 화두를 던졌던 북한군 장교는 오히려 자신이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는 것 같았는데, 전쟁이 하도 오래 진행되어 지금은 잊어버렸다'고 대답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고지전(한국전 자체로 확장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전쟁영화들의 대부분이 전쟁의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통해 대답하려는 시도와 달리 감독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의 마지막에 집중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영화를 통해 읽어볼 수 있는 감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의미 없는 전쟁의 비극적인 결과는 오직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 남을 뿐이며, 이것은 인간성의 파멸로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치열한 교전 중에서도 아름답게 꽃 피웠던 동포애적인 소통의 기억들조차도 누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라는 탐욕의 논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인권과 생명, 그리고 평화가 강조되는 오늘날 전쟁의 의미를 묻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진 않다. 어떤 전쟁도 오늘날에는 명분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처음부터 반전영화의 성격을 강하게 시사한다.

9ㆍ11 이후 부시 정권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집단을 향해 전쟁을 선포할 때도,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대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도 다수의 사람들은 부시가 제시한 전쟁의 의미를 곱게 보지 않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뮌헨'에서 테러와 보복테러의 메커니즘과 그것의 파국적인 결과를 환기시켰듯이, 사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에서 남는 것은 인간성의 파멸뿐이다. 혹자는 '고지전'을 시지프스 신화와 비유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전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최소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승자가 규정하는 의미는 생각할 수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군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한 의미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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