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신앙- 이흥래장로<2>

나의삶 나의신앙- 이흥래장로<2>

[ 나의삶나의신앙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1년 07월 01일(금) 15:25
   
▲ 젊은 시절 섬 목회를 통해 혹독한 전도훈련을 받은 이흥래장로는 혹한의 땅 러시아에서 '1만명 전도' 결실을 맺었다./ 사진제공 이흥래장로
거문도에서 목회를 하며 전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1만명 전도'를 자신있게 외쳤던 패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도무지 복음을 확신있게 전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 낯선 섬에서 문화적 이질감을 느낀 것은 물론이고, 어린 나이의 내가 온갖 미신을 믿는 어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돌아온 반응은 냉대였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거듭된 전도 실패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게다가 한 부흥회에 참석해 구원의 확신도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의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

'나 자신에게 믿음이 없으면서 무슨 1만명 전도를 한단 말인가...' 죄책감을 떨쳐버리려 기도에 매달렸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인휴 선교사님이 함께 마을을 돌며 전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노방전도가 아니라 집집마다 방문했다. 선교사님은 전도 대상자의 방에 들어가면 큰절부터 올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뒤 자신을 소개했다.

감동이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타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체면과 명예를 던져버리면서 복음 전파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 대단했다. 그리고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인휴 선교사님의 전도를 지켜보고 그대로 따라하며 영성이 서서히 회복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어느덧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고 목회가 점점 재미있어졌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젊은 사람이 고생이 많다"면서 격려가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딸 둘을 낳으면서 행복은 배가됐다.

거문도 목회 3년에 접어들면서 군에 입대하게 됐다. 군대생활은 피곤하고 지치기 일쑤였지만 '자기발전'을 위해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역사서를 읽다 경제나 경영, 세일즈에 관한 책을 접하면서 '재정'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결국 '1만명 전도'를 위해서는 종잣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사업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우들을 대상으로 직업과 전공을 물어 사업 분야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인간관계 노하우도 터득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 자신을 홍보하면서 사업 정보도 얻고자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전남 동부지역에 속한 마을 이장과 교회 교역자 1만여 명이 그 대상이었다.

편지를 받은 분들은 당황스러우셨으리라. 생면부지의 젊은이가 서면을 통해 "사업 아이디어를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답장을 꽤 많이 받았음을 기억한다.

1967년 6월 27일, 제대 3일 후인 이 날 순천 북부시장에 스테인레스 그릇 상회를 열었다. 마침 놋 그릇이 스테인레스 그릇으로 대체되던 시기라 사업이 날로 번창하며 제조업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그러다 나에게 중대한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다. '너무 사업에만 치중했다'는 회개와 함께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던 시간을 전도에 돌렸다.

농어촌과 섬을 돌며 전도용 영화를 상영했다. 영사기가 한 대 밖에 없어 필름을 갈아 끼우는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복음을 전했다. 설교와 간증을 섞어 남도 사투리로 풀어냈다. 호응이 제법 좋았다.

'영화 전도'는 9년이나 지속됐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결신을 원하는 사람 중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도법을 통해 행정 처리와 조직을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노하우를 얻었다.


이흥래장로
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 모스크바장신대 이사장
<정리=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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