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9일

7월 4~9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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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29일(수) 14:50

월-속으로 원하는 것들
본문: 전 10:19-20
찬송가: 290장(구 412장)

재물에 초연한 척하고 권력자나 부자를 저주하기는 쉽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포용하시고 용서하시면서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심은 그들이 남보다 더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착한 면이 있고 모범적인 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망하심은 위선과 가식 때문이었다. 돈을 좋아하면서도 아닌 척하고 권력을 부러워하면서도 초월한 척하는 거짓을 지적하신 것이다.
 
돈은 범사에 이용된다. 악한 곳에 쓰여지는 측면만 볼 것이 아니라 좋은 면에 쓰여지는 긍정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개역성경에는 돈은 범사에 응용된다고 하였다. 돈으로 망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선용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다. 우선 하나님께 드려 영광을 돌리고, 가정을 위하여 사용되고, 이웃을 위하여 봉사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본다.

그런즉 부자를 저주하지 말고 그들이 부요함을 가지고 선용하도록 기도함이 중요하다. 권력자도 마찬가지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하심은 비판없이 받으라 하심이 아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저주만 해선 안된다. 성경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한다. 그들의 선용을 위해서다. 나아가서 되고 싶다면, 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잘한 선수를 저주만 해서는 안된다.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 훌륭한 선수 밑에 훌륭한 선수가 나온다.

오늘 본문에는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한다고 하였다. 사람은 생각한 쪽으로, 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정말 중심에 부러움이 있다면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오늘의 기도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재물이나 권력이나 선용하게 하시고, 부러운 것이 있다면 저주보다는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명옥 목사
광주무등교회 시무


화-믿음의 말을 합시다
본문: 민 13:25~14:10
찬송가: 300장(구 406장)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란광야에 진을 쳤을 때 하나님은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택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등을 탐지하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는 사명을 주어 가나안 땅으로 보냈다.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로 나눠졌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는 말을 했으나 다른 정탐꾼들은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하면서 부정적이고 불신앙의 말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실과 다르게 악평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온 백성이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통곡했다. 불신앙의 말이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전염된 것이었다. 백성들은 소수 믿음의 사람의 말보다 믿음 없는 다수의 말에 동조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믿음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보시고 가나안 땅 정복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셨다.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도 가나안 땅 정복과 같은 과제가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 이 때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믿음의 말을 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언제나 긍정적이고 믿음의 말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종실 목사
덕산교회 시무


수-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본문: 약 1:1-11
찬송가: 543장(구 342장)

시험을 당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고독할까? 왜 이렇게 불행한 삶이 연속될까? 왜 나의 실존은 이렇게 무의미하게만 느껴질까?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해도 때때로 위기와 불행을 겪을 수 있다. 모든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정신적인 절망감으로 몰아간다. 어느새 하나님으로 인한 영적인 풍성함과 생명감을 놓쳐버리게 되고 원망과 의심으로 가득하게 한다.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그리스도인일수록 영적인 권태감과 무력감으로 교회 생활과 봉사와 기도하는 일에 회의를 느낄 수 있다. 기쁨과 만족을 주었던 영적인 관심과 일들이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야고보서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잡다한 문제들을 '여러가지 시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여러가지 시험들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시험들을 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 적극적으로 그 시험들을 풀어갈 것을 당부한다.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종종 넘어지는 이유가 있다. 5절에서는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혜가 부족할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을 대처하는 방식과 지혜는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시험을 하나님께서 잘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한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믿음과 기도가 있다면 어떠한 시험에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온갖 시험과 시련을 이기는 지혜를 허락 하옵소서. 온갖 시험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성숙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진성 목사
하양제일교회 시무

목-믿음으로 살아라
본문: 히 11:1
찬송가: 542장(구 340장)

믿음은 늘 긍정의 편에 서 있다. 믿음은 단 한번도 부정과 친해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긍정의 힘이 곧 믿음의 출발점이다. 누구나 긍정의 흐름을 타는 순간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흐름에 합류하는 자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란 확신에 찬 삶을 살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성경은 한결같이 믿음은 가능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조상들이 좋은 예가 된다. 가나안 정탐에서 돌아왔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기생 라합 역시 믿음의 눈으로 되어질 일들을 보았기에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이 구원받게 되었다. 골리앗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가는 소년 다윗은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강권한다. 그렇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오늘의 기도

능력의 하나님! 긍정적이며 가능성의 확신을 갖는 믿음 갖기를 원합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상용 목사
살림교회 시무

금-백발이 되기까지
본문: 사 46:1-13
찬송가: 430장(구 456장)

벨은 바벨론의 주신이며, 느보도 벨의 아들신이다. 1절의 말씀은 바벨론이 멸망하면서 이들 우상이 엎드러지겠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즉, 우상은 나라를 지키지도 못하고 그들의 형편을 개선하지도 못함을 말한다.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장부가 되라"는 말씀은 무가치한 우상 숭배를 과감하게 청산하라는 말씀이다. 우상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평안이나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반면, 우리 하나님은 마치 부모님과 같다.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아기가 어미의 사랑을 미처 깨닫기 전에 그 품을 떠나듯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욕심을 잉태하고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고 만다. 이에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하나님은 신 이상의 분이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죄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방의 고레스를 사용하신다.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이 포로 귀환의 길에 오르게 하셨다. 본문의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상징하면서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님을 예표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고레스를 보내신 것처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은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상을 헛된 것으로 만드시며, 세상 열방의 강력한 군주 고레스조차도 사용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이다.

오늘의 기도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 주의 품을 떠나지 않게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동환 목사
영동교회 시무


토-산 자와 죽은 자
본문: 마 8:21-22
찬송가: 246장(구 221장)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에 데라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70세에 아브라함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세월이 흘러 그 아브라함은 사라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어느 날 데라는 하나님을 따라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그리고 손자 롯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다.(창 11:31)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되던 어느 날 하나님은 저들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조카 롯은 가나안으로 이주를 했다. 아버지 데라는 당시 나이가 1백45세였고 가나안으로 가야하는 길을 멈추고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다가 2백5세에 죽었다.(창 11:32-12:4)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청중들에게 위에 언급한 사건을 가지고 설교하는데 아버지 데라가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행 7:4)

데라의 죽음에 대하여 창세기와 사도행전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오늘 본문이 필요하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제자는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장사 지내러 가야겠다고 의논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아 있으되 죽은 자가 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산 자이다. 아버지 때문에 죽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륜, 천륜보다 생명이 우선이다.
 
왜 스데반은 데라가 살아있는데 죽은 자라고 했을까? 하나님을 따라 계속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우배 목사
금포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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