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신앙- 이흥래장로<1>

나의삶 나의신앙- 이흥래장로<1>

[ 나의삶나의신앙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1년 06월 27일(월) 10:20
   
▲ 순천성경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이흥래장로(사진 뒷줄 오른쪽 네번째). 이 장로는 2학년 때 '1만명 전도'를 서약했다./ 사진제공 이흥래장로

"나와 같이 평생 5만명 전도할 사람은 손을 들어주세요. 안계십니까? 그럼 4만명.. 3만명.. 2만명..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1만명 전도할 사람 손들어 주십시오."

정적이 흘렀다. 그 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부흥회 목사님을 향해 "제가 전도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아! 내가 무슨 말을 한건가' 느끼는 순간, 뜨거움이 가슴 깊은 곳으로 전해져왔다.

교인들은 박수를 쳤고, 나는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았다. 내 나이 18세였다.

이후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 난 그 약속을 지켰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셨다. 혹한의 땅 러시아에서 1만명 전도의 꿈을 이뤘다.

낮은 자를 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하나님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신앙을 갖게된 것도, 기도를 먹고 자란 것도 감사할 따름이다.

난 1941년 12월 2일 전남 보성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위로 누나가 있었다. 부모님은 기독교 신앙인이셨다.

아버지는 농업과 소 중개업을 하셨는데,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다. 아버지는 내가 농촌을 벗어나 공무원이나 세계를 누비는 마도로스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목회자가 되길 원하셨다. 어머니는 늘 내게 "하나님의 일을 했으면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기도는 나에게 목회자의 꿈을 심어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에 화재가 났었는데, 재건되기까지 20리(8km) 정도 떨어진 이웃마을 교회를 걸어서 다녔다.

그러다 어린 마음에 도가 지나쳐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골목대장이었던 나는 교회 전도사님 사택에 쓸 땔감을 구해 드린다는 명목으로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아 장작 두 개비씩 가져오라고 해 어른들께 야단을 맞은 기억이 있다.

보성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목회에 대한 비전이 생겨났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진학했다.

성경학교 2학년 1학기 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일이 생겼다. 순천중앙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전도를 위한 결단의 순서가 있을 때 '1만명 전도 서약'을 한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삶에 분명한 목표가 설정됐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계획이 머릿 속에 세워졌고, 2학년 2학기부터 율촌 평촌교회 담임전도사로 활동했다.

평촌교회에는 당시 1백여 명의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었다. 주중에는 학교 공부때문에 순천에 있다가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교인 집을 돌며 심방하고, 주일에는 설교를 계속했다.

'목회 초년병'으로서 밤낮 없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 부인 이시청권사를 만나 보성에서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은 바쁜 삶 가운데 행복한 안식이었다.

이 때 인휴(Hugh Maclntyre Linton)선교사와 인연이 맺어졌다. 당시 인휴선교사는 상여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하면서 나를 데리고 축호전도를 다니셨다.

이를 계기로 해 순천성경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인휴선교사를 따라 거문도에 들어가 덕촌 장촌교회(지금의 서도교회) 목회를 시작했다. '1만명 전도'의 첫 단계를 거문도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내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이흥래장로
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 모스크바장신대 이사장
<정리=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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