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 신앙2> 석성 장학재단 통한 가난한 이들 섬김

<나의삶 나의 신앙2> 석성 장학재단 통한 가난한 이들 섬김

[ 나의삶나의신앙 ]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1년 04월 20일(수) 09:54

조용근장로
새로운교회ㆍ세무법인 석성 회장

아버지가 돌아온 후에도 우리 가족은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번 돈으로 '그리무(크림)'와 '비로드' 옷감을 사가지고 들어오다가 세관에 걸려 모두 빼앗기고 빈 몸으로 돌아오셨다. 당시 우리 가족들은 옷 한벌로 한 계절을 버텨야 했고 늘 배가 고팠다. 이런 현실 속에서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절에 다니며, 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셨다. 그러던 어머니는 내가 11살 때 이웃 교인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절망과 같은 현실 속에서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의 가난과 고난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며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다행히 나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지역 최고의 명문고였던 경북사대부고에까지 합격을 했다. 학비를 낼 수 없어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고등학교 3학년까지 부잣집 아이를 가르치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지만 학비와 하숙비를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할 수 없이 세무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만 20세가 되던 1966년부터 대구서부세무서에 출근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길거리에서 동창들을 만날 때면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야간대학이라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 1년 후 청구대학교(현 영남대) 야간부에 지원했다. 경쟁률이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합격해 4년 전액장학금을 받게 됐다. 부족한 나를 높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모아두었던 대학등록금을 헌금했다. 담임목사님께서 강단에서 나의 헌금 사연에 대해 교인들에게 말하자 너무도 기뻐 환한 웃음을 숨기지 못하시전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밖으로는 가난으로 인해 주눅들고, 안으로는 아버지의 무시와 폭력에 시달리시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셨지만 부족한 아들을 위한 기도는 늘 쉼 없이 이어가셨다. 희망이 없는 것 같았던 나의 미래에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학업 욕심을 조금더 내기로 했다. 야간학부로는 최고 명문인 성균관대 편입시험을 보기로 한 것이었다. 2명을 뽑는 시험에 또 당당히 합격하고 국세청 세정감독관을 찾아가 부탁했다. "대구에서 근무 중인데 서울 편입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서울로 발령을 내 주십시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나는 동대문세무서에 발령을 받았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바쁘고 피곤한 생활이었지만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생활이 안정되니 서서히 다른 쪽으로도 눈을 돌리게 됐다. 저녁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저녁을 사주며, 술도 즐겼다. 내가 가진 것과 이룬 것을 과시하며 매일 밤 모임을 갖고, 그러다 보니 교회를 빠지는 일도 많아지게 됐다. 당시 군미필 상태였던 나는 세속의 즐거움이 좋아 입대를 몇년 간 연기할 정도로 그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안동에서 교육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5살 위의 형이 술을 마시다가 의식을 잃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형의 싸늘한 시신을 보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지 느끼게 됐다. 형의 유골을 금호강가에 뿌리며 깊은 슬픔 속에서 나의 나태했던 신앙을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내 신앙, 그리고 내 삶의 또다른 '터닝포인트(turning point)'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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