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신앙- 홍희천장로<2>

나의삶 나의신앙- 홍희천장로<2>

[ 나의삶나의신앙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1년 02월 28일(월) 13:17
   
▲ '동문비닐'로 시작한 사업은 플라스틱 필름 시트 제조업체인 '(주)동원'으로 확대됐다. 사훈은 '하나님을 위하여,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다.
우리 집 식구는 교회가 '마음의 안식처'였다. 부모님은 "우리 집이 세상적으로 보면 비록 가난할지라도, 성경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약2:5)' 하시지 않던가. 부모님께 배운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감싸였던 어린 시절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감미롭고 풍요로웠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 입학과 군 복무, 대학 졸업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처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 복무 중 소개로 만나 교제하던 김홍숙권사와 1966년 결혼을 하게 됐다. 아내는 나와 같은 모태신앙인으로, 늘 침착하고 경건한 모습에 반했다.
 
처가가 있던 대전에 방 하나와 부엌이 딸린 신혼집을 차렸다. 우리 부부는 대전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성가대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인생의 반려자가 믿음의 동역자니, 감사한 일이다.
 
신혼생활은 궁핍했다. 당장에 직장이 구해지지 않아 형에게 쌀을 얻어 먹기도 했고, 결혼반지를 몰래 팔아 쌀 한가마니를 사왔다가 들통이 나 아내 가슴을 아프게도 한 기억도 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아내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장의 권위를 세워주려 한 아내의 배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체신 공무원 응시표를 내밀었다. "시험 한 번 봤으면 좋겠다. 내가 접수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시험 날이 주일이었다. 주일예배는 빠질 수 없기에 시험을 대충 치르고 교회로 빨리 왔다.
 
기대를 전혀 안했는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18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용산우체국에 발령이 나 곧바로 대전에서 서울 청량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월급은 6천3백원. 쌀 사고 출퇴근 시 전차를 타면 남는 돈이 없었다. 와이셔츠의 소매와 깃은 늘상 닳고 헤져있었다.
 
견습이 끝나고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전에 섬기던 대전제일교회의 김만재목사님께 연락을 받았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나 좀 만나고 가라"는 말만 전하셨다. 의아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조퇴 후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목사님은 "김달섭장로님이라고 큰 도매상을 하는데, 사람이 필요하다 하더라. 자네를 추천했네"라고 말씀하셨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적성에 맞는가 알아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장로님을 만났다. 장로님은 업무에 대한 간략한 설명 후 '얼마를 받기 원하냐?'고 물으셨다. 난 당시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2배를 불렀다. 장로님은 놀란 얼굴을 하시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비슷한 급여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게 대전에서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됐다. 장판과 가방 만드는 인조가죽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출근해 셔터문을 열었고, 낮에는 등짐을 지고 오후부터는 자정 넘어까지 장부를 정리한 후 가장 늦게 퇴근했다. 믿고 맡겨준 분들을 생각하며 피곤해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장로님이 나를 좋게 보셨나보다. 어느날 부르더니 관리 감독직을 맡기셨다. 진양화학이라는 업체의 대리점을 책임지게 됐다. 첫 달 매상이 배가 오르더니 계속해서 성장이 됐다.
 
신명나게 5년 간을 일하다 당시 학교 교사를 하던 아내가 서울로 부임 발령이 나자 '나도 내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서를 냈다. 1973년 11월 종로 5가에 비닐가게 '동문비닐'(주식회사 동원 전신)을 차렸다. 내 나이 35살 겨울이었다.
 
홍희천
창동염광교회 원로장로 / (주)동원 대표이사
<정리=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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