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왜 보아야 하는가?

<4> 왜 보아야 하는가?

[ 최근신학동향 ] 9. 예술신학(기독교 미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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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9일(화) 19:10

 

사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의 일차적인 검증은 보는 것이다. 보았더니 있더라, 또는 보았더니 없더라 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니면 계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신학의 원초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이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석하지 않고는 그 어떤 신학도 무의미해지며 더욱더 믿음의 문제는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신학의 오래된 연구로 말씀의 계시와 자연계시를 통하여 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소망할 때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규명에 대한 주장이 서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소망하므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소망하겠는가? 결국 믿음은 하나님을 소망하게 하고 소망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 '크리스티나의 세계(1948년)', 앤드류 와이어스 作.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앤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 1917.7.12~2009.1.16, 미국)'의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1948)'이다. 넓은 들판에 한 여인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서 저 멀리 보이는 농가 주택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의 소망은 그 집에 머물고 있다. 그것을 보면 그 집은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 곳이고 고향일 것이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팔과 다리는 정상이 아니다. 아마 소아마비에 걸려서 장애가 있는 듯싶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더 이상 힘이 없어 자신이 바라보는 그 집까지는 갈 수 없는 듯 보이나, 그러나 그곳이 그녀의 최후의 소망이기 때문에 다시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집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엄밀히 말하면 그곳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새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 : 31)"

만약 그녀에게 그 소망과 목표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미 그녀는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였을 것이고 가야겠다는 의지도 사라졌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집 앞에서부터 뻗어나간 마차바퀴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 마차바퀴는 들어간 마차바퀴일까? 아니면 나간 마차바퀴일까, 만약 이 마차바퀴가 나간 마차바퀴 자국이라고 한다면 이 여인에게 소망은 없다. 그것은 그 집이 빈집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들이 바로 여기에 기어가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들까지 모두 장애를 앓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 모르게 절망감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소망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목표이며 소망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분명히 보고 있는 것 이다.

지금 보고 있는 마차바퀴 자국은 분명히 들어간 마차바퀴이다. 그곳에는 크리스티나의 부모가 분명히 계신다. 성도된 우리들 역시, "오직 유일한 소망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하는 고백을 할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민준목사 / 선한이웃교회/장신대ㆍ한일장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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