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엇을 볼 것인가?

<3> 무엇을 볼 것인가?

[ 최근신학동향 ] 9. 예술신학(기독교 미술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0월 12일(화) 20:04
   
▲ 절규,뭉크(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 作.

인간의 궁극적 문제는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 이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죽음의 문제는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이면서 항상 비극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의 길로 안내해 주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가느냐 하는데에 사망과 생명의 갈림길이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인식은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시간관을 희랍인들은 '크로노스(chronos)'라고 하였다. 즉 나로부터 종말을 향하여 주어진 시간을 셈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시간을 쓴다면 결국 우리들의 존재의 결말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종말에 대한 인식이 없고 막연히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셈이 있다. 복음에서 보여준, 종말로부터 지금을 바라보며 세는 시간관이다.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종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말씀을 믿고 종말로부터 지금을 바라보면 지금은 절망을 향하여 가는 시간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는 기회를 얻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많은 화가들이 크로노스로 셈하는 시간의 끝을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카이로스의 시간을 셈하게 하였다.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는 언제나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죽음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늘 죽음을 생각하였던 화가이다.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절규'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번 글로 남겼는데 그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쳤다. 피요르드 위로 해는 서산에 지고 구름은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를 들었다."

그림을 보면, 한 사나이가 마지막 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무심코 앞서 가던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그 다리는 다시는 건너 올 수 없는 다리였다. 그는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되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이미 하늘도 예전의 하늘이 아니다. 푸른 하늘은 붉은 하늘로 변해버리고 바다와 모든 사물들은 역류하고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서면서 보여지는 얼굴,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만 따라 살았던 비극적 인간의 마지막 얼굴이다. 절규하는 사나이의 얼굴은 해골처럼 보인다. 종말을 그리려고 했던 많은 화가들은 해골을 그리고 그 앞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를 기록하였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악" 소리치며 절규하는 것일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절망적인 순간을 먼저 본다면 지금부터 종말까지의 시간들은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시간들이 창출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영원한 시간을 소유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종말의 때 절규하는 이 모습은 사실 뭉크 자신의 실존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뭉크의 자화상이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이제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셈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최민준목사 / 선한이웃교회/장신대ㆍ한일장신대 겸임교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