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떻게 볼 것인가?

<2> 어떻게 볼 것인가?

[ 최근신학동향 ] 9. 예술신학(기독교 미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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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06일(수) 14:16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카라바조(1571~1610) 作.
사람의 오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것은 '보는 것'이다. 촉각이나 미각은 감각기관이 사물에 직접 닿지 않으면 대상을 알 수 없다. 후각과 청각이 미치는 거리도 수 킬로미터를 넘지 못한다. 반면 시각은 찰나를 훑는가 하면 멀리는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에서 2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에 이른다. 고대서부터 봄(I See)은 앎(I know)을 넘어서 "살아있음"과 같은 의미였다. 구약의 야웨는 '말씀' 곧 들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 예수를 성육신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를 청각 중심의 종교 곧 '들음의 종교'로만 알고 있으나 기독교는 시각, 곧 '봄의 종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천국은 들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봄으로써 아는 최대의 소망의 현장이다.(예술신학/신광섭/기독교서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그러므로 성경을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은 화가이다. 특히 보는 것의 절정은 자신을 보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제목의 이태리의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Caravaggio, 1571~1610)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그림이다. 카라바조는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재능 있고, 성급하고, 난폭한 화가였다. 그는 테니스와 유사한 운동시합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고, 끊임없이 불안에 쫓겨 12년 동안이나 도망 다니면서 그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이후로는 평생 성경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이 마지막 그림에는 확실한 사인을 남겼다.

다윗이 목을 베어들고 있는 골리앗의 얼굴을 보라, 그 얼굴은 분명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머리만 남아있는 골리앗의 얼굴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고 있다. 이 엽기적인 자화상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회개하며 거듭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회개란 뉘우침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됨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윗으로 변하고 싶은 갈망을 담은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의 두 얼굴을 담은 것이다. 죽어야 되는 나, 그리고 새롭게 변화되고 싶은 나! 그동안은 골리앗처럼 살았다. 힘과 권세와 물질과 능력을 앞세워서 무엇이든지 불가능은 없다고 기고만장 했던 그는 이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는 자신이 죽어야만 진정한 평화와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신학이 우리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성경말씀을 풀어주어서 그 말씀 앞에 나를 조명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것에만 치우치면 성경은 풀어지되 자신은 풀어지지 않는 맹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미술은 또 다른 차원의 성경해석이며 영성 신학적 도구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성경에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곧 나의 삶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때 비로소 진정한 성경지식이 될 것이다.

최민준목사 / 선한이웃교회/장신대ㆍ한일장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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