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7월 3일

6월 28일~7월 3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24일(목) 09:40

월-웃게 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 21:1-7
찬송가: 406장(구 464장)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고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말과 같이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웃고 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보면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결혼한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아픔과 서러움의 눈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사라가 장막 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엿듣다가 속으로 웃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1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또 다시 사라로 하여금 웃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낳고 난 이후의 기쁨과 감격의 웃음이었다.
 
하나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안을 평안으로, 미움을 사랑을 바꾸어주신다. 그래서 사라로 하여금 웃게 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웃게 하신다.
 
때때로 근심할 때, 낙심할 때, 슬퍼할 때, 괴로워할 때, 두려워할 때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렘31:13)"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날 위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자.

오늘의 기도

절망을 소망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안을 평안으로, 미움을 사랑을 바꾸시는 하나님.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불쌍히 여기시사 위로하시고, 힘주시사 기쁨과 감사로 웃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삼 균 목사
대성교회 시무


화-새 사람을 입으라
본문: 엡 4:21-24
찬송가: 289장(구 208장)

성장은 자연계의 기본이치이다. 병들거나 죽은 것이 아닌 이상 생물은 성장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자라야 한다. 구원받은 그 자체에 머물러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새로운 옷을 입기 위하여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려야 하듯 새 사람의 옷을 입기 위하여 과거의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옛 자아와 과거의 생활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성숙해져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새 사람의 옷을 입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버려야 한다. '유혹의 욕심'이란 거짓된 욕망을 의미한다. 즉 거짓된 욕망에 잡혀서 썩어져 버릴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둘째,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심령'이란 믿는 자들의 정신을 다스리는 성령이나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의식이나 생각은 행동을 지배하며 변하는 의식이나 가치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진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각이나 가치가 새로워 져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어야 한다.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삶을 말한다.
 
거짓된 욕망과 구습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올바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구원받은 사실에 머물지 말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심령의 변화를 받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침묵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 18:9-15
찬송가: 401장(구 457장)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기다려야만 한다. 아이 없는 부모의 아이에 대한 기다림, 미혼 남녀의 결혼에 대한 기다림, 병에 걸린 사람의 치유에 대한 기다림, 인생의 성공을 위한 기다림 등.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과는 다른 훨씬 힘든 기다림이 있다. 믿음의 기다림이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길이 막혀 죽거나 망하지 않는다. 막힌 길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망하고 죽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길 되신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은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의지하고 있다면 무한한 길이 준비될 것이고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고 고백하고 선포해야 한다. "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막힘이란 없다. 막힌 길처럼 보일뿐이다. 그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욥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왜 입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주님은 대답하신다. "나를 바라보아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외면하고 계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고통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우리를 향하여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불로 제련된 금. 그것이 바로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때로는 그 침묵이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줄로 믿습니다. 더욱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동 만 목사
동부교회 시무


목-네가 죽어야겠다
본문: 창 22:6-7
찬송가: 216장(구 356장)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다. 맷돌을 돌려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있어야 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결정적인 때 그것이 없어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본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중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얻은 아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인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간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중요한 질문을 한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다른 것은 다 준비되어 있는데 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도 제물이 없으면 제사는 드려질 수 없다. 질문을 한 장본인인 이삭이 제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네가 제물이다. 네가 죽어야겠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다"라고 대답한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불과 나무가 아니다. 제물이 없는 것이 문제다. 누가 죽을 것이냐는 것이다. 사람도, 교회도, 일꾼도, 교육도,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제물이 없다.
 
제사는 내가 드려도 나는 제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제물을 찾고 계신다. 희생을 기피하는 시대에 주님은 "네가 죽어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라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이 없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일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 광 재 목사
노원교회 시무


금-시온의 대로
본문: 시 84:5-7
찬송가: 559장(구 305장)

성경적 복의 개념과 복 받는 비결에 관한 귀한 말씀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시84:5)." 시온의 대로는 성전을 향해 연결된 고대 이스라엘의 대로(大路)다. 이 길을 따라서 성전에 올라가고 이 길을 통하여 복을 받았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어서 우리의 심령과 삶의 현장에도 시온의 대로가 시원스레 열리길 소망한다.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자신의 집을 구입할 때 중요한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하였다.
 
첫째, 교회를 중심으로 1㎞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일 것. 왜냐하면 교회는 가까워야 좋지만 너무 가까운 곳보다 새벽마다 왕복 2㎞를 오가면서 건강도 챙기기 위함이다. 그는 지금 70세가 넘었는데도 걸음걸이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둘째, 담임목사님 사택보다 조금 못한 규모의 집이다. 두 번째 조건에는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담임목사님을 더 잘 모시려는 소원이 내포되어있다. 실제로 그가 섬기는 교회는 37년 전 그 도시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교회였으나 지금은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그가 섬기는 담임목사님은 노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였다.
 
셋째, 날마다 자신의 웃는 얼굴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동네이다. 그렇다. 그는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때도 굳이 교회가 있는 쪽으로 향해서 기도한다. 창문을 열면 멀리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 잘 되었다.

오늘의 기도

은혜의 샘이 말라버린 심령을 부드럽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사랑하기 힘든 사람까지도 사랑할 능력을 주옵소서. 예배와 담임목사님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주시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추 연 욱 목사
성환중앙교회 시무


토-긍휼의 마음
본문: 요 19:23-27
찬송가: 96장(구 94장)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자세와 거리가 있다. 긍휼은 도움 이전에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파하는 마음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요한을 향하여 어머니를 부탁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머니가 걱정스러우셨다. 그러기에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즉 기도하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제자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그럼에도 두 제자는 간데없고, 십자가 앞에는 요한만이 있었다. 그래서 본문은 요한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의 어머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동고동락을 하였으면서도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팽개치는 사람일까? 아니면 요한처럼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일까? 당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요한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요한을 선택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요한을 아들로 받아들이고 대신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런 마음이 긍휼이다.
 
긍휼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 아파하는 사람을 돌보시고 아픔을 치유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이셨다. 우리가 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씀씀이를 넘어서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세우는 삶이 긍휼의 삶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수 있는 마음과 형편을 허락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 도 출 목사
비전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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