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샤, 다라올지야!', 나의 두번째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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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에서온편지 ] <3> 선교사의 꿈을 이루다 몽골 안광표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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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10일(목) 09:58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하나님의 선교는 동역선교이다. 함께하는 선교가 얼마나 귀한가를 몽골에서 보고 느끼게  되었는데, 1992년부터 시작된 우리 교단의 몽골선교는 처음부터 안교성선교사와 윤순재선교사의 동역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 언어의 차이, 문화의 다름에서 겪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몽골은 어느새 가장 편안한 고향과 같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위치한 교회에서 현지 교인들과 함께.

필자는 주일 오전에는 안교성선교사가 담임으로 사역하는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주일 오후에는 우리 교단이 세운 몽골의 어머니 교회인 아멘교회(당시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가 동역)의 몽골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선교사들의 연합과 협력선교, 그리고 몽골 현지 지도자들과의 동역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간의 동역은 새내기 선교사들에게 마음 든든한 선교사역의 모습이었다. 선임 선교사들은 개척하고 신임 선교사들은 정착 훈련 등을 거쳐 선임 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와 기관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우리 교단에서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는 아멘교회의 인적 협력과 한인교회의 재정적 협력으로 세운 올리아스테교회(오효강선교사가 개척 시작)이다. 오늘의 올리아스테교회는 올리아스테지역의 복음화를 책임지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 이후 세르겔트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이 연합과 협력을 통한 열매로 세워졌다.

오후에는 아멘교회에서 몽골인들과 교제했는데 대학생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다. 윤순재선교사가 설립한 울란바타르대학의 학생들이 아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스승과 제자사이의 자연스러운 교제가 이루어졌다.

당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학생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박~샤! 다라올지야!"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에 당황해서 학생들을 향해 한국말로 야단을 쳤던 기억이 있다. "너희들 선생님에게 그런 욕을 하면 되느냐?"고 꾸짖었다. 몽골어가 서툴렀던 내 귀에는 한국말로 "이 자식! 따라 올까~!"로 들렸던 것이다. 선생님을 배웅하며 "선생님! 다음에 만나요!"라는 말을 욕하는 소리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 이후 학생들은 나에게 인사를 할 때면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눈으로만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선교지에서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현지인들과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과 한국인이 같은 몽골리안 계통이다 보니 외모로 쉽게 구별이 가지 않아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당시 한국 대사와 국립대학 학술회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다. "대사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깜짝 놀라면서 신기하다는 눈으로 필자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어디서 그렇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배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 한국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직 몽골말은 배우는 중입니다"라고 했더니 계면쩍어 하시면서 한국인과 몽골인 구분이 안 되어서 몽골분이신줄 알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도 대사님을 만날 때면 정말 한국인과 몽골인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몽골인들의 초청을 받고 아내 최춘원선교사와 함께 동행하면 아내를 몽골인으로 알고 "당신은 몽골인 아내를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생활하는 가운데 몽골은 어느새 내게 가장 편안한 고향과 같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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