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에 평화의 나무를 심자"

"검은 대륙에 평화의 나무를 심자"

[ 주님의 평화 이땅에 ] 아프리카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5월 27일(목) 10:08
이은용 / 총회 파송 케냐 선교사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은 1960년대에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였다. 아프리카 54개의 나라 중 대부분은 유럽의 열강들로부터 독립한 후 지금까지 부족간의 갈등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지난 5년간 전체 사망 인구중 48%가 폭력으로 사망하였고, 6ㆍ25 당시 한국에 참전용사를 파견한 에티오피아(Ethiopia)와 홍해 연안의 에리트리아(Eritrea)의 내전에서는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1967~1970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던 나이지리아-비아프라 사이의 내전에서도 1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수단에서는 북부 지방 무슬림과 남부 기독교인들 사이의 내전으로 1백5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외에도 우간다 내전으로 50만명 이상, 소말리아 내전으로 3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아프리카에서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으로 사망하거나 난민이 되어 국제 고아의 삶을 살고 있다.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경제적 빈곤, 전후 발생한 각종 질병, 고아와 과부들, 매춘 등 심각한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발생한 '싸움 재앙'에 대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가고 있는 검은 형제들의 소식을 듣고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며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교단에서는 1992년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1994년 르완다 종족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2008년 케냐에서 정치적 부패로 야기된 선거후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고 아프리카 검은 형제들의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아프리카 검은 형제들의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보시고 하늘 아버지께서 기쁨의 미소를 지으셨다.
그렇다면 우리 교단은 1992년 소말리아와 1994년 중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1960년 독립한 소말리아는 사회주의 정권 하에 절대빈곤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이러한 고통은 1991년 모하메드 알리 마디(Mohamed Ali Mahdi)와 모하메드 아이딧(Mohamed F. Aidid) 두 파 사이의 갈등과 전쟁으로 번지면서 지난 20년동안 약 30만명이 사망하고 1백50만명의 피난민을 낳았다. 이러한 부족간의 갈등과 폭력을 막아보려고 UN에서는 평화군을 파견하였으나 소말리아인들의 반외세적인 태도와 공격으로 인하여 1995년 UN 평화군은 소말리아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후에 소말리아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버려진 나라로 취급을 당하고 오늘날은 세계의 해적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소말리아 복음화를 위하여 본교단에서는 1992년 소말리아 내전이 한창 불붙을 당시에 아프리카 선교회(당시 대표:임종표선교사)를 통하여 소말리아 구호 사역을 하였다. 기근으로 죽어가는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급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했고, 전쟁으로 인하여 생겨난 각색 병자들에게 의료 선교팀을 파견해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또한,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근처의 자시라(Jasira)라는 마을에 초등학교에서 3백50명의 아이들을 교육했다. 이때에 필자는 유럽과 미국에서 온 많은 국제 구호단체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6.25 한국 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구호 사역을 담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내가 한국에서 와서 소말리아 난민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신들이 본 한국은 전쟁 이후에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어떻게 너희가 이곳에 와서 난민들을 구호 사역을 하느냐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복을 주시어 오늘날 우리가 소말리아인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고 당당하게 증언하면서 나는 한국 교회가 해야할 일이 바로 이런 일이구나 생각하였다.
 
1994년 4월 6일, 20세기의 최대의 종족 대학살의 비극이 중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났다. 르완다에서는 오랜기간 동안 후투(Hutu)부족과 투시(Tusi) 부족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거대한 폭력인 전쟁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당시 르완다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백일 동안 1백17만4천명이 사망하였다고 보고했다. 하루에 4백명, 1분에 7명이 사망한 꼴이다. 이로 인하여 40만명의 전쟁 고아와 50만명의 과부들이 생겨났다.

많은 과부들과 어린 여자아이들이 르완다 육군(RAFㆍRwandan Armed Forces)과 심지어는 대통령 경호대원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러한 강간(Rape)은 에이즈의 전염 수단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고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죄로 인한 사망'이 전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가 죽었고 2백만 명은 주변국으로 피난하였다. 이들은 2~3평 남짓한 비닐하우스에서 10여 명의 가족이 쪽잠을 자면서 지냈고 유엔(UN)과 비정부기구에서 배급해주는 최소한의 식량으로 연명했다.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장티푸스, 에이즈 등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 갈등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학살, 강간, 질병, 기근에 대하여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1994년 우리 교단 총회 산하 사회부(당시 사회부장:고 김동익 목사)에서는 르완다 대학살로 인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본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을 통하여 1백만 명의 피난민이 거주하는 중부아프리카 자이레(Zaire) 고마(Goma) 지방에 구호사역 본부를 설치하고, 난민들이 많이 모여사는 비루마(Biruma), 루가리(Rugari) 두지역서 구호 사역을 하였다. 우리 교단에서 지원한 구호금은 매일 1천5백명의 난민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난민들의 생명을 살리는 간이 진료소 운영, 비정규학교지만 5백명의 난민 어린아이들을 교육하는 '천막학교'를 운영하였다. 

필자는 르완다의 부족 갈등으로 생겨난 '르완다 민족 대재앙'의 불을 끄기 위하여 전세계에서 몰려든 비정부기구들과 함께 일하면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폭력으로 인하여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교회는 생명이 살아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통해서 폭력 갈등의 희생물이 되어 죽어가는 열방을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릴 것인가?
아프리카의 폭력 갈등에서 생겨나는 대량학살, 강간, 강도, 질병,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역을 하여야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절대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부분을 균형있게 개발하는 총체적인 접근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총체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서 한국교회는 좀더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현장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눈에 보이는 빠른 결과를 선교사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는 선교지에서 평화의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선교사들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해야한다.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멘토링하는 좋은 채널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1991년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3년간 마사이 원주민들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바나나 농사를 통하여 얻은 '열매론'을 나누려고 한다.

우리 가족이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마을은 아프리카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킬리만자로 산이 바로 보이는 광야였다. 우리 부부는 광야 생활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살도록 하셨다. 낮에는 소똥집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전도하고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켜고 목동들을 가르치는 삶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분주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이 살고 있는 광야에는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에게 어떤 열매를 선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바나나 농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바나나 나무를 심어 메마른 광야에 푸른 바나나 숲과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 열매의 꿈을 꾸면서 농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사의 경험이 전혀없는 우리가 광야에서 바나나 농사를 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진 광야의 땅을 파기 위해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광야의 박토를 옥토로 바꾸기 위해서 마사이 원주민들에게 소똥을 얻어다가 유기비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똥냄새와 친해져야 했다. 바나나 나무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메마른 땅을 수백미터 파야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이러한 땀의 결과로 우리는 광야에 푸른 바나나 숲을 이루고 땀의 영양분이 스며있는 바나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아프리카에서 폭력 갈등으로 인한 '고통의 나무'의 뿌리를 뽑고 '평화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 평화의 나무를 심기 위해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완전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이사야 53장의 예수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주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일꾼을 길러내야 한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지만 내면에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마른 광야에 열매 없음을 보고 애태우며 우는 사람이 필요하다.
땅을 파는 방법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땅을 파는 사람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는 '편안함을 누리는 삶'보다 '평화를 이루는 고통의 삶'을 택해야 한다.

평화의 나무를 심기 위해서는 좋은 땅이 필요하다. 메마른 땅을 좋은 땅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오랜 땀과 고통이 필요하다.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에 익숙한 손'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보기좋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 돈과 생명인 시간을 다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객토하여 좋은 땅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좋은 땅에서 나오는 열매를 하늘 아버지께서 흠향하시고 기뻐하는 꿈을 꾸면서….

한국교회가 아프리카와 열방에 폭력과 전쟁의 나무를 뽑아버리고 평화의 나무를 심기 위해서는 바나나 열매를 배달하는 배달 민족이 아니라 바나나 나무를 심는 수고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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