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돈을 벌어 다른 사람을 도우리라"

"꼭 돈을 벌어 다른 사람을 도우리라"

[ 나의삶나의신앙 ] 성호정장로 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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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11일(목) 10:47

송학식품  대표 ㆍ대광교회

내가 가끔 지금의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 본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 일밖에 특별히 내가 했을 법 한 일은 떠오르지 않는다.
 

   
▲ 매주 드리는 월요직장예배 후 송학식품 임직원들과 함께 했다.

필자는 지금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식품사업을 해오고 있다. 국수류, 쌀 떡류, 냉면, 쫄면, 당면 등 모두 1백50여 종의 식품을 제조해 전국에 공급하는 것은 물론 미국, 일본, 동남아, 유럽 등 20개국에도 수출해 전 세계에 한국의 맛을 알리고 있다.

우리 땅에서 수확한 농산물, 우리의 순수기술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음식 문화를 발굴 및 창출하고 있으며, 한국의 먹을거리를 세계에 정착시켜 세계 속의 송학식품으로 거듭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치고 있다.

부산 범일동에 10평짜리 가게를 얻어 국수 기계 한 대를 놓고 다섯 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송학식품의 송학(松鶴)은 부친의 아호를 딴 것으로 '소나무와 학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송학'이 큰 성공을 거두며 '나눔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부친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국수사업을 시작하셨다. 당시 국수 기술은 원초적인 단계라 반죽에서부터 국수를 뽑는 기계를 돌리는 일 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일손이 부족했던 부모님은 걸핏하면 장남인 나를 불러내 일을 돕게 했다.

1946년 경북 영천시 화북면 대천리에서 2남 4녀의 맏이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으므로 나의 국수 인생은 40여 년이 넘는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국수가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까닭에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일을 도우며 자란 나는 우리 여덟 식구의 생계 수단이 되었던 국수사업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 한 번도 회사원이 되거나 다른 일을 해보겠다 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장을 돌며 국수를 배달하고 수금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 덕에 6.25전쟁으로 궁핍할 때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 위기가 닥친 때는 지난 1966년. 아버지가 공장매매 문제로 3년간 소송에 휘말리면서 회사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보따리 짐을 들고 한여름에 야반도주해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 자리를 잡은, 지금의 용산전자 거리가 있는 곳에서, 다시 삼각지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나는 잠잘 곳이 모자라 하천가에 나가 비닐을 깔고 자야했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는 천막생활도 견딜 만했으나 겨울은 정말 힘들었다. 추위와 싸우던 어느 날 장사를 하고 밤늦게 돌아와 보니 미군점퍼가 천막 안에 놓여 있었다.

아주 따뜻한 미군점퍼는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급의류였는데 누군가 나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천막 안에 슬며시 넣어주고 간 것이 분명했다. 그때 그 옷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 다음에 꼭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생활은 끼니를 때우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맏이인 탓에 온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던 중 집에 있는 낡은 기계로 만든 뻥튀기과자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판매가 여의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전거를 타고 수원, 인천까지 나가 뻥튀기를 팔기 시작했다. 새벽에 뻥튀기를 준비해 자전거 뒤에 싣고 페달을 힘차게 밟아 인천으로 향한 뒤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 여러개를 팔려고 동인천 등을 돌아다니다 보면 미처 통행금지시간까지 집에 도착하지 못해 파출소로 끌려간 일도 많았다.

그렇게 뻥튀기는 나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보물이었다.

/ 정리 임성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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