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담론인가?

< 2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담론인가?

[ 최근신학동향 ] 최근 신학 동향 2. 과학신학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2월 03일(수) 16:26

뭔가 난해할거 같은 과학신학. 과연 누구를 위한 담론일까? 무엇을 위한 담론일까? 단지,신학과 과학을 모두 잘 아는 극소수의 전문가들만을 위한 담론일까? 한번 단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학은 몰라도 과학 없이 생활할 수는 없다. 전기, 전화, 라디오, 컴퓨터, TV, 영화, 자동차, 병원 등 이 모든 것은 다 과학에 기반을 둔다. 또 모든 신앙인들은 신학은 몰라도 사실상 신학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예배, 설교, 교육, 상담, 선교, 친교 등 이 모든 것은 다 신학에 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과학신학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의 삶과 신앙에 직결되는 담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담론이 왜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경험부터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필자는 3대에 걸친 기독교 집안(조부는 황해도 초대교회 장로, 부친은 가톨릭으로 전향)에서 자랐다. 과학 전공의 대학생 시절 무신론에 빠져 있다가 대학원 때 회심의 체험을 하고 뿌리를 찾아 개신교에 귀의했다. 그 후 약 10년간을 신앙인이자 과학도로서 신앙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 채로 살았다. 이 분리된 삶은 많은 갈등을 안겨주었다. 교회에서 과학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과학을 배척하거나 불편해하는 정서가 팽배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과학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과학신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깊은 회한과 함께, 필자와 같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많은 지성적 ‘경계인’들에 대한 소명이 생겼다. 이것이 필자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과학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먼저, 과학신학은 지성적 경계인들을 위한 담론이다. 종교를 배척하면서 과학만능을 외치는 과학주의와 과학을 배척하면서 경직된 도그마만을 주장하는 교조주의 양극단 사이에는 수많은 지성적 경계인들이 있다. 이 경계인을 분류하자면, 교회 밖에서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는 '친종교적 지성인', 교회 안에서 과학의 가치를 인정하는 '친과학적 신앙인'들이 있다(도표). 이들은 과학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해 회의적이며, 또한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필자가 겪었던 갈등을 겪고 있다. 과학신학은 이런 경계인들의, 경계인들에 의한, 경계인들을 위한 학문이다.

둘째, 과학신학은 교회를 위한 담론이다. 과학기술시대의 교계는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경계인들을 품을 수 있는 효과적인 신학적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신학이다. 과학신학은 주류 신학 전통을 계승한다.

중세신학자 안셀무스는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신앙 없는 이성은 교만이요, 이성 없는 신앙은 태만'이라고 했다. 이것은 전통 신학의 고전적인 정의로 널리 인정받는다. 즉, 신학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담론, 합리적 신앙을 추구하는 담론인 것이다. 과학신학은 바로 이 주류 신학 전통을 이어받는다. 바로 이성의 최고봉인 과학과 전통적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성적 경계인들을 품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시대에 처한 교회의 제사장적 사명이자 선교적 사명인 것이다.

셋째, 과학신학은 사회를 위한 담론이다. 다시 말해, 과학신학은 과학기술사회의 역작용을 치유하기 위한 공적 담론이다. 과학만능주의의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상은 인간존재의 의미상실, 즉 니힐리즘을 파생시켰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실존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사조들은 과학기술을 원천적으로 배척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사회에 대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이 되기 어렵다. 그러면 그런 대응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학기술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와 맹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적 담론으로서의 과학신학이 지향하는 방향이며 그 시대적 사명이다.

이와 같이 과학신학은 결코 극소수의 전문가들만을 위한 담론이 아니다. 과학신학은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지성적 경계인들을 위한 담론이다. 나아가서 과학신학은 과학기술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교회와 사회를 위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공적 담론인 것이다.

문영빈교수/서울여대 ㆍ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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