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리포트] '보스톤한인교회'편 5

[디아스포라 리포트] '보스톤한인교회'편 5

[ 디아스포라리포트 ] "이민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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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 17일(수) 00:00
   
 
신축 중인 교육관( Education Community Center) 건축 조감도.
 

 
이 영 길
보스톤한인교회 목사

얼마 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책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본인이 쓰신 책인데 성경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펴낸 책이다.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한다면, 나도 할말이 있다. 신학교수님들은 콧방귀도 안뀌실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는 이 확신이 더해 간다. "성경은 이민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이민자로서 가나안 땅으로 이민 와 살았다. 율법의 표상 모세도 이민자이다. 히브리인으로 애굽 궁전에서 살았고, 그 후 쫓겨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민자로 살았다. 그리고 예언서의 태반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연관되지 않은가?
 
신약은 잘 아시겠지만 헬라어로 쓰여져 있다. 예수님 당시는 아람어가 그들의 언어였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베드로는 아람어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베드로 전후서는 헬라어로 썼다. 베드로도 이중언어의 이민자로서 이민자의 정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구약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이민자의 정서를 알아야 한다. 그들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곧 성경은 이민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감히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혹시 '르호봇'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라고. 이 단어는 이삭의 이야기(창 26장)에서 나오는 단어이다. 이민자 이삭이 그랄 지방으로 이사 가서 생긴 일이다.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팠는데 두 번씩이나 우물을 빼앗긴다. 세번째 우물을 팠다. 이 때는 더 이상 빼앗기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 "르호봇(넓다)!"
 
르호봇은 이민자인 이삭이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후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재차 확인 받는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창26:24)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과연 "르호봇"을 부른 그 골짜기가 넓었을까? 사실 좁은 땅에서 얻은 우물을 보고 이삭은 노래한 것이다. 르호봇, 이 이야기는 이민자의 정서로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들이 다른 성경에는 펼쳐지지 않을까?
 
그러니 이민자의 정서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성경의 절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이삭의 이야기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르호봇'은 바로 이민자들의 가슴 속 깊게 스며드는 노래이다.
 
이민자들은 좁은 땅에서 산다. 아니 재미교포들은 넓은 미국 땅에서 좁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마냥 좁은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넓게 살수 있다. 이삭이 이러한 삶을 보여주었다. 자기의 삶의 처소에서 '르호봇' 노래를 부르는 자는 더 이상 좁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넓은 삶의 축복을 부르는 자들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교회는 교육관을 신축 중이다. 좁은 땅에 지하까지 합해 3층짜리 건물을 짖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더 좁은 느낌이 든다. 작은 건물을 짓는데 이웃들이 아우성이다. 정말로 좁은 곳에 우리 교회가 자리잡고 있구나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가슴에 울리는 노래가 있다. 이민자 이삭에게서 배운 노래이다. '르호봇'
 
우리는 이 교육관에서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이민자의 노래를 가르치려고 한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좁거나 넓거나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르는 자는 물론이고 듣는 자들도 르호봇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점점 좁아지는 이 세상은 이 노래를 그리워하고 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번에 건립되는 교육관을 ECC(Education Community Center)라고 부르기로 했다. 주말에는 교육관이 되지만 주중에는 이웃을 위한 공간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부른 노래를 마음껏 듣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직접 듣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메아리라도 듣게 된다면, 그들도 주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 메아리 안에 오래전 예수님께서 좁은 십자가 위에서 부르신 '르호봇'이 남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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