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이 준 선물

파병이 준 선물

[ 미션이상무! ]

이성호 목사
2024년 08월 07일(수) 09:22
202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청해부대35진 충무공이순신함에서 진행된 세례식.
청해부대 35진, 2021년 6월 충무공이순신함에서 시작된 파병 생활은 훈련소의 그것보다 훨씬 특수하고 긴밀했다. 좁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생활해야 한다. 과업 시간과 여가 시간이 분리되어 있지만, 모든 것이 배 한 척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 그것도 7개월이란 기간 동안! 대하기 어려운 윗사람, 보기 싫은 아랫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무지 피할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각종 병과와 직별의 사람들이 한배를 탔다. 민낯으로 만나야 했던 이 과정은 우리를 난처하고도 가깝게 인도했다.

과업 시간 내 필자의 주요 임무는 하사 이하 장병 총원을 대상으로 면담을 하는 것이다. 약 150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던 인원들이 점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다른 부대에서 만났더라면 쉽게 듣지 못할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됐다. 자신의 가정사에서부터 직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까지, 군종목사로 근무하면서 장병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처럼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장병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믿고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어주어 고맙다고 답변했다.

의무적으로 면담을 받지 않았던 장병들과는 자연스럽게 친해지려 노력했다. 식사 시간, 운동 시간,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얼굴을 트고, 접촉점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많은 승조원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는 야간 위문 활동을 통해서였다. 음료수, 젤리, 초콜릿, 과자류 등을 준비해서 화요일엔 1직, 수요일엔 2직, 목요일엔 3직 당직자들을 찾아가 위문을 했다. 깊은 밤, 정적이 흐르는 그때 간식 가방을 들고 찾아온 군종참모를 싫어하는 인원은 아무도 없다. 간식을 나눠주며 잠깐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각 근무지의 분위기와 장병들의 마음을 살폈다. 대화를 더 나누길 원하는 이들은 따로 낮에 면담을 했다.

간부 한 명이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낮에 군종실로 초대했다.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기 시작했다. 직별에서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정사가 복잡했고, 고집이 아주 센 친구였다. 한두 번으로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았다. 몇 번 더 만나자고 제안했고 총 일곱 번을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중학생 시절까지 교회를 나갔단 소리를 들었다. 자연스레 권유하여 주일예배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에는 예배를 낯설어 했지만 나중에는 여러 봉사를 하게 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배에서 맞은 성탄절 아침 이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특별한 환경은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선물했다. 지금까지 군생활을 하면서 의무장교, 법무장교와 대화할 일은 거의 없다. 파병 기간 법무참모와 둘이 한방을 썼고, 바로 앞 방이 의무장교 두 명이 쓰는 방이었다. 우리 방에는 필자가 가져온 커피머신이 있었는데, 여유가 날 때마다 넷이 모여 커피를 나눴다. 우리의 대화는 늘 새롭고 즐거웠다. 어느 날인가 법무참모가 신앙적인 질문을 건네왔다. 이전까지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무척 반가웠지만, 티 내지 않고 담담하게 신앙에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법무참모 집안의 종교는 불교였지만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필자를 통해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법무참모가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의무장교 두 명 모두 함께 예배를 드렸다. 법무참모와 의무장교 한 명이 기독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성탄절에 이 둘은 세례를 받았다. 파병 전에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필자의 해군해병대 군종목사로서의 정체성은 파병 전과 후로 나뉜다. 낯설면서도 도망갈 수 없는 한 척의 배, 그 안에서 군종목사로서의 역할과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다. 이 모든 것이 파병을 떠나기 전 계획하거나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또 나의 노력에 의해서만 맛보았던 경험도 아니었기에, 필자는 이것을 파병이 준 선물이라 부르고 싶다.

이성호 목사 / 해군평택교회·해군 2함대 군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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