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지지는 '나'로부터

진정한 지지는 '나'로부터

[ 현장칼럼 ]

길준수 사무국장
2024년 06월 21일(금) 09:34
종종 칭찬과 인정과 격려를 바라는 직원들의 하소연을 듣는다. 필자 역시 가끔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다. 그러나 잠깐 기분 좋게 하고, 잠깐 힘이 나게 하는 효과 말고는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아서 더 강렬한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인정 중독'이라는 말도 회자 된다. 소셜미디어 세상이 된 이후로는 중독성이 더 강화된 듯하다. 자기가 뭘 먹고 뭘 입고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를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피드백 하나 더 받는 것이 너무 중요해져 버렸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지난 경험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욕망을 내려놓지 않는 한, 진정한 만족도 자유도 편안함도 내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왜 우리는 이토록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일까? 인류가 터득한 '오래 살아남는 비법' 중 하나라고 해도 대답이 되겠지만, 사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좀 더 성장 욕구를 자극하는 대답을 찾아보려 한다. 나는 인정 욕구와 인정 중독의 원인을 '과거 결핍 경험에 대한 집착적 기억'에서 발견한다. 뭔가 자신이 부족하고 잘못된 것 같은 오래된 경험이 누구나 있다. 그런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부단히 애를 쓰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여전히 맘에 안 들고 부족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충분히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성취를 해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래서 더 강렬한 인정과 더 강렬한 성취와 더 많은 칭찬을 밖에서 밖으로 찾아다니지만, 그저 삶이 고단할 뿐이다. 어찌해야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습관처럼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자. 진정한 지지는 나로부터 시작해야 끝이 보인다.

10여 년 전에 직원연수를 떠났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가 가을 단풍철이었으니까 어디를 가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특히 그날은 맑은 공기와 화창한 날씨에 넓고 푸른 하늘이 어우러졌으니 가을을 온전히 즐기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갔던 곳은 산 정상에 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산책로를 잘 갖춘 유원지였다. 모두가 즐거워했다. 유독 눈에 띄는 동료가 있었다. 일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맑은 표정과 마냥 즐겁고 편안한 몸동작, 홀로 떨어져 걷는 모습이 천진난만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듯했다. 뭐가 그리 좋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좋고 행복하단다. 그 어떤 근심도 노력도 결핍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래전에 이런 종류의 만족감을 심리학자 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 불렀다. 절정이라 해서, 범상치 않은 최정점에 올라야만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경험은 일상에 널려 있다. 그러나 숨어 있다. 활짝 웃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종교적인 신비경험 속에서, 감동적인 영화로 눈물을 흘리다가, 홀로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문득 발견할 수도 있다. 이 경험의 특징이 있다. 그 경험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래서 자의식이 줄어들고 눈치가 사라지고 경험 속으로 몰입한다. 과거 부정적 기억이 설 자리가 없다. 아무런 피드백이 없어도 괜찮고, 모든 것이 그런대로 지낼만 하다. 그러니 가능한 한 자주 '절정경험'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타인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스스로 결핍이 느껴질 때는 더더욱 그리하면 좋겠다. 일부러 찾아가고,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해 보자. 필요하면 자기만의 절정경험을 만나러 과감히 떠나는 것도 좋겠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때까지 계속 가 보는 것이다.

센터 한쪽 공간에는 조그만 정원이 있다. 센터 개관 초기에는 맥없이 늘어진 맥문동 어린 풀들만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정원 위로 툇마루를 형상화한 베란다가 툭 튀어나와 있었으므로 그대로 두면 어린 풀들이 말라죽을 것이 뻔했다. 이미 조경 나무 몇 그루가 말라 죽었던 터라 맥문동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틈나는 대로 물을 주고 자갈을 제거하며 정원을 가꾸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새싹이 돋더니 진녹색 맥문동 이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한여름에 이르러서는 난생처음 보는 보랏빛 무릉도원이 펼쳐졌다. 어느 봄날, 자원봉사자 한 분이 더 풍성한 맥문동 정원을 만들고 싶은 열정에, 기존 맥문동 줄기를 잘라 내는 일을 감행했다(새순을 많이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고 함). 오랜 시간 반려 식물 키우듯 가꾸어온 정원이 망가지려던 찰나에, 현장을 목격한 직원이 급하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허겁지겁 뛰쳐나가 자원봉사자를 제지했다. 그러나 이미 정원 한쪽 구석 맥문동이 잘려 나간 상태였다. 무릉도원 같던 정원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이후 정원을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아, 애써 외면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잘못된 정원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어느 날, 지인이 센터를 방문했다. 센터를 소개하느라 이리저리 다니다가 그만 지인이 맥문동 정원을 보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먼진 정원을 가꾸셨나요? 너무 예쁘네요." 처음엔 놀리는 줄 알았다. 그 말에 나도 유심히 정원을 살펴보았다. 한동안 밑동 잘린 맥문동만 보였었는데, 몇 달 만에 정원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보라색 꽃들이 너무 예뻤다. 맥문동 사이사이 피어난 나팔꽃도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비 두 마리가 정답게 노는 모습이 더해지자 센터 정원은 나에게 다시 무릉도원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밑동 잘린 맥문동'을 두서너 개씩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 잘못된 맥문동보다 멋지게 피어난 꽃들이 훨씬 많다. 자기 안에서 '밑동 잘린 맥문동'만 바라보며 얼마나 자주 절망에 빠지고 그 결핍을 밖에서 채우려 하는지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99%의 더없이 아름답고 풍성한 꽃들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내가 나를 지지하는 다른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상투적인 표현이겠지만, 이왕이면 나의 좋은 점을 알아주고, 좀 더 스스로 용서하고, 자주 가슴을 쓰다듬으며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반복하자. 그리고 틈나는 대로 절정경험을 찾아서 자기 존중을 위한 기반을 튼튼히 하는 수밖에! 여력이 된다면 타인과 세상도 좀 더 너그럽게 보아주어야겠다. 세상도 꼴사나운 '밑동 잘린 맥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길준수 사무국장 / 구립월계노인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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