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순교의 각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일생 순교의 각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完

정안덕 박사
2022년 11월 29일(화) 15:42
김순호, 중국과학원 안영희 선생 소묘(1995).
그렇다고 해서 추호라도, 남하하신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폄하할 생각은 가질 수 없다. 당시라면 나 스스로라도 당연히 '월남'했을 것이요, 실제로 나의 가족들도 다른 믿음의 식구들과 더불어 신앙 자유를 찾아 고난의 천 리 길 행군을 목숨 걸고 다들 감당하셨다. 그리고 여생을 이산으로 찢겨진 채, 그 끝없이 어둡고 막막한 동굴을 지나들 오셨으니…. 그러니 그이들도 다 '참 자유자'가 아닐까? 다들 그 자유를 부둥켜 안으려고 얼마나 애써 희생하여 이루었고, 결국은 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 민족의 선교행전 속에는, 북에 남은 '작은 이들'을 지키고 보살피기 위해, 사지를 무릅쓰고 '나의 길'을 빛도 없이 간 이들이, 그 다섯 분 추모되는 여성: 김경순, 김순호, 백인숙, 장수은, 한의정을 포함하여, 실제로는 또 얼마나 많이 계셨을까?

'옥중에 매였으나, 양심은 자유 얻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성도들 같이…. 그 길, '하는 수 없어'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자원함으로' 그러고 싶어 묵묵히 '내 갈 길 가오리' 노래하며 즐거운 뜻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간 것이니, 그들 역시 한가지로 '참 자유자'가 아닐까?

그이들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는 '그날' 북쪽에 그대로 남아 있던 무수한 성도들에게, 그리고 그 후예들에게 '전부 다 내려온 것은 아니었으니…'라고 전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자유하나…,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되어, 여전히 이곳저곳 무덤 같은 칠흑 속에서 묵묵히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신(新) 자유자'들이 또 수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정중히' 인식했으면 하는 것이다.

기꺼이 그러한 '밀알'이 되고자 했던 여정의 끝은 '순교'였다. 김순호 본인도 그 극도로 불길하나 가장 영광스러운 결말을 예감하고 계셨을까? 순교자기념사업회가 추모하여 기리는 다섯 분의 여교역자들 중, 김경순, 백인숙, 장수은, 한의정 네 분은 모두 1950년 6.25 직전이나 직후 순교하였다. 김순호만 1951년 초입, 대략 반년 뒤 주님 품에 안겼으니, 먼저 간 벗들의 소문은 여전히 북녘땅에 거하던 그의 귀에도 속속 전해졌을 것이다. 배수진을 친 모양 더 이상 피해 갈 곳도 없었을 그 신의주의 교역 현장에서 자신의 신상에도 곧 닥칠 기울어진 순교의 붉은 잔을 시시각각 감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최후 그 순간만이라도 편안히 눈 감자'는 안일한 '선종'을 바라지 않으랴? 그러나 오늘, 참으로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김순호 개인의 '인생 귀숙'의 그 시간을 되새겨 음미해 보면서, 그 종말의 순간이야말로 선교사 일생의 기도였고, 이 세상에서 그의 한 몸 '온전히'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가장 진실한 헌신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강요가 아니었기에 피할 수 있었고, 피할 수 있었기에 부득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막다른 길'에 봉착하긴 했지만, '뜻'이 있었기에 우연한 죽음도 아니었다. 그가, '죄를 질 바에는 아예 죽는 것이 낫겠다'라는 다짐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그가 맞이한 최후의 그 순간 그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거부할 수 있었다. 또한 방치되어 '내버려진 양'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한 일생의 가치로 여겨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며 '순교적 생활'을 하였다. 일생 순교의 각오로 살았기에, 그의 죽음이 충동적인 일시적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그가 또 한 분의 '자유자'가 아니었나 싶다. 평시에 늘 뜻을 세워 살며 믿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다가, 인생의 극점에 다다르자 보이시고 맡기신 양떼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그 생명의 '권'을 스스로 써 버리고 말았으니….

과연 여생의 밝고 찬란한 미래적 도경이나, 힘써 이루고자 했던 훌륭한 삶의 '목적'과 사명 같은 것들이, '그날' 그에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 세상이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그것들이 '그날' 김순호에게 과연 생사를 가를 만한 관건이 될 수 있었을까? 다만 그가, 과연 무엇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날' 자신의 지극히 선한 '복'임을 알았기에, 또 그러한 자는 '죽어도 살 것'을 믿었기에 그와 같이 '죽기까지' 따랐고, 그래서 '죽도록' 충성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또한 '오늘',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력 속에 있을지라도 끝까지 머리 숙여 견디며, 막다른 길목이 목전이지만 구령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고, 각자 흩어져 맡겨주신 자리에서 묵묵히 힘쓰는 '나그네' 주 위해 청춘 바친 우리 모든 선교사님들의 '진심'이 아닐까?

이젠 그만, 모든 감사와 함께, 김순호 선교사님 이야기를 접어야겠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금쪽같은 이 한 마디 말씀으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정안덕 박사

# 김순호 연보(年譜)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출생.

연도 미상, 재령 명신학교 졸업.

1919년 12월 19일-1920년 4월 18일, 정신여학교 재학 중 독립 운동 참가로 서대문감옥 복역.

1921년, 정신여학교(13회) 졸업.

연도 미상,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졸업

연도 미상,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경도 성진 보신여학교 교원 역임.

1927-1931년 추정. 재령동부교회 전도사 시무

1931년 9월 11일, 산동 선교사 파송.

1931-1932년, 산동성 내양현 거주 중 한어 공부.

1932년 9월-1933년 4월, 북경에서 중국어 연수 후 산동 귀환.

1934년 가을-1936년, 한어 말씀 사역을 위주로 선교 사업 수행.

1934-1935년, 내양 조선선교사회 서기 역임.

1935년 11월 25일, 동 선교사회 회계 역임.

1936년 8월, 안식년 귀국.

1936년 9월 10일, 총회 선교 보고 후,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제정.

1937년 상반 년, 전국 교회 순회 산동 선교 사업 보고.

1937년 3월, 산동 선교사 방지일; 만주 선교사 최혁주 총회 파송.

1937년 5월 7일, 방지일 산동 내양 도착.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로 방지일 철수 귀국. 박상순, 이대영 본국 소환.

1937년 하반 년, 김순호 산동 선교지 복귀 좌절.

연도 미상, 목단강교회 협력 사역.

1937년 11월 5일, 정신여학교 산동 선교 사업 보고.

1938년, 방지일 재 내화. 박상순과 함께 산동 청도 정착. 조선장로회 청도선교구 개설.

1938년 10월 17일, 김순호 청도 귀환. 방지일과 동사. 즉묵 내지 청도 선교 사업 재개.

1939년 9월 12일, 김순호에 대한 본국 소환 결의.

1939년 시간 미상, 일본 요코하마공립여자신학교 수학.

1939년 겨울, 만주 선교사 파송. 길림성 쌍양현 최혁주 목사와 협력 전도 사역.

1940년 4월, 이대영 산동 즉묵 진입, 1948년까지 목양.

1940년, 청도교회 개척. 방지일과 김명집 협력 목회.

1940년, 박상순, 내양 진입 시도 후 귀국.

1940년 9월, 길림 쌍양현 전도 상황 총회 보고.

1940-1941년 추정, 흑룡강성 목단강교회 전수창 목사와 협력 사역.

연도 미상, 북만 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역임.

1941년, 동만지방 전도부 총무 역임.

1942년 2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만주 선교 종료 결정.

1942년 9월 22일, 만주 선교사 면직.

1942년, 평양신학교 여성신학부 초대 이사 피선.

1942년 10월경-1945년 해방 전, 동만 평생여전도회 총무, 용정중앙교회 전도사로 조선인 사역.

연도 미상, 신의주제2교회 전도사 사역.

1945년 8월 15일, 해방.

해방 후, 목단강교회 전수창 목사와 협력 교역.

1945년 9월 3일, 중국공산당 연길 접수.

1945년 12월, 중국공산당 용정 접수.

연도 미상, 용정 동산교회 이권찬 목사와 협력 교역.

연도 미상, 함경도 청진 신암교회 전도사 사역.

1946년, 평양신학교 재 개교.

1947년경, 평양신학교 여성신학부 교수 겸 여학생 기숙사 사감 역임.

1948년 여름 추정, 평양신학교에서 제자들과 결별.

1948-1951년 정월 초, 신의주제2교회 전도사 사역.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전쟁 발발.

1950년 6.25 전후, 김경순 전도사(1900-1950), 백인숙 전도사(1909-1950), 장수은 전도사(1911-1950), 한의정 복음사(1898-1950) 이상 4인 북녘에서 순교.

1951년 신정 경 추정, 김순호 선교사(1902-1951) 신의주에서 순교.

1951년 정월 초, 김순호의 시신 이권찬이 확인.

1957년 9월, 방지일, 홍콩을 통해 부산으로 귀환.

1960년대 후반, 순교자기념사업회 발족, 매년 4월 초 순교 여교역자 추모예배 거행.

1975년, '순교 여교역자' 출판.

2018년 3월 6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순호기념 여학생관'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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