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 걷기

만보 걷기

[ 시인의세상보기 ]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22년 10월 12일(수) 10:00
저마다 하나씩 취미가 있기 마련인데 내게도 몇 가지 취미가 있다. 열정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해온 것은 프로야구 시청이다. 늦은 오후 혼자 소파에 몸을 파묻고 시청한다. 긴 시간을 보기 때문에 가족들의 눈총을 많이 받는다. 가끔씩 야구장에 직관을 가기도 한다. 꼴찌팀인 한화 이글스팬이다.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는 욕을 이때는 조금 한다. 최근 생긴 취미는 캘리그라피이다. 평소에 손글씨를 좋아했는데 제대로 쓰고 싶어서 문화회관에서 배우고 있다. 펜으로 쓰는 것과 붓으로 쓰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또 하나. 취미라고 하기에는 멋쩍지만 걷기를 취미로 꼽을 수 있다. 하루 만보 걷기가 목표다. 걷기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부실해지자 운동이 필요했다. 평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 탓에 울며겨자먹기로 선택한 운동이 걷기이다. 걷는 것이 무슨 운동이 되는가 싶었지만 걷다보니 꽤 괜찮은 것이다. 축구도 야구도 자전거도 달리기도 굳게 마음먹어야 가능하지만 걷기는 마음먹지 않아도 부담없이 할 수 있다. 걷는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걸어서 집으로 간다. 이처럼 걷기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가능하다. 또 비용이 들지 않는다. 집에 있는 운동화만 있으면 된다. 준비물도 필요 없다. 시간과 장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가 와도 그런대로 괜찮다. 나는 오래 걷기 위해 런닝화를 하나 샀다. 걷기어플을 이용하여 포인트를 적립하면서 걷는다. 걷다보면 어느새 적립금이 쌓여 딸아이에게 햄버거를 사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 근처의 여러 걷기 코스를 알아두고 이곳저곳 주유하며 걷는다.

산책길을 걷다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경쟁하듯 열심히 걷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사색하며 걷는 사람도 있다. 걷다보면 많은 풍경과 만난다. 계절과 만나고 꽃과 풀과 나무와 여러 동물도 만난다. 걸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수많은 걷기대회와 걷기코스와 산책길이 생긴 것은 걷기의 매력 때문이다. 걷기는 가장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움직임이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적의 행위가 걷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작가들이 걷기를 예찬한다. 헨리 데이빗 소로,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세갈렌, 피에르 쌍소, 랭보, 스티븐슨, 하이쿠 시인 바쇼 등등.

'걷기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은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라고 얘기했다. 걷기가 기도의 한 형식이라는 글에서 마음이 정지되었다. 그만큼 걷는 것은 간절한 소망과 성찰의 시간을 담고 있다.

걷기는 자본의 속도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되도록 걷지 못하게 하는 장치와 도구들로 가득하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을 보라. 문명은 인간들이 가장 적게 걷고 빠르게 이동하는 동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일제히 빠르고 신속함을 목표로 뛰고 있을 때 걷는 행위는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보일까. 걷는 것은 자본이 이해하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느리고 정지된 시간 속을 살아야 될 때가 있다. 그 시간은 성찰의 시간이며 비로소 본질적인 인간의 시간이다. 오늘도 만보를 걷는다. 걸으며 생각한다. 때론 아무 생각없이 걷거나 풍경만 보고 걷는다. 걷다보면 내 숨소리, 심장소리, 맥박소리, 머리칼 냄새, 손끝으로 전해지는 바람의 감촉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순례의 시간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행은 세상과 절연된 수도원이나 깊은 다락방에서가 아니라 군중 속의 고독 가운데서도 가능하다. 그 수행을 가능케하는 게 바로 걷기이다. 걷다가 걷다가 뒤돌아보면 어느덧 내가 꿈꾸는 산티아고의 순례길에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 지도 모르겠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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